로맹 가리는 왜 "사랑해야 한다"고 했을까
사랑을 생각한다.
거의 매일, 매번, 매 순간에 사랑을 생각한다.
사랑이 사람과 가깝기 때문에
사랑이 없는 삶은 떠올릴 수 없기 때문에
사랑이 사람의 삶에 거의 전부이기 때문에
사람이 사랑과 닮았기 때문에.
로맹 가리가 프랑스 문단과 평론가들의 조롱을 비웃어줄 속셈을 포함해 만들어낸 에밀 아자르는 소설 <자기 앞의 생>에서 아이의 기억을 빌려 이렇게 묻는다.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있나요?"
그리고 역시 아이의 기억을 빌려 대답한다.
"사랑해야 한다."
유년 시절 로맹 가리는 썩 좋다고 할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품을 수 있는 모든 종류, 온갖 환상으로 가득한 기대 속에서.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 쏟아내는 사랑을 받으며.
그럼에도 유년의 로맹 가리는 조금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자라서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아서 점점 더 괴로워하는 듯싶더니, 마침내 어머니가 품었던 기대, 기대했던 환상 일부를 현실로 했을 때, 그 어느 때보다 자랑스레 여겨줄 어머니를 기대한 순간에 이미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 죽음을 깨닫게 된다.
여기에, 사랑이 있는가?
자신이 꿈꾸던 아들을 만들기 위해 죽음마저 감추는 어머니, 그 집념을 사랑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가?
받는 '나'를 위한 사랑은 없고
주는 '나'를 위한 사랑으로 가득한 사랑의 세계.
로맹 가리가 질식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던 건 높이 오를 수 있었던 비행 덕분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필사적으로 계속 비행하기 위해 애썼던 게 아닐까.
로맹 가리의 삶과 작품은 사랑을 품고 있다.
넘칠 만큼 가득해서 그의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마저 울게 할 만큼 절절히 끓어오르는 사랑을.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로맹 가리는 주문이라도 외듯이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치 그 주문을 잃어버리면 더 이상 세상에 머물 수 없게 되기라도 하다는 듯이.
근거라고 할까.
로맹 가리의 죽음, 마지막에 주목해 보자.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있나요?"
이 물음을 다시 곱씹어 보자.
"사랑해야 한다."
이 대답도.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 사랑을 하려면 대상이 있어야 한다.
'해야 한다'가 성립하려면 충분한 동기와 애씀의 이유가 있어야 한다.
대상이 없으면 동기도 없어지기 마련이고 애쓸 이유가 없이는 삶도 이유를 잃기 쉽다.
그토록 어렵게 견뎌온 삶을 버릴 수 있던 건 그래서가 아니었을까.
다시 사랑을 생각한다.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는지를 생각한다.
사랑해야 한다.
"사랑해야 한다."
두 번, 소리 내어 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