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게르한스 섬의 오후
소확행, 소확행 하는데 그 의미가 뭔지 궁금해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소확행은 '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줄임말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수필 한 편의 제목이 '소확행'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이런 거죠.
서랍 안에 반듯하게 개켜 돌돌 만 깨끗한 팬츠가 잔뜩 쌓여있다는 것은 인생에서는 작지만 행복의 하나(줄여서 소확행)가 아닐까 하는데, 이건 어쩌면 나만의 특이한 사고방식인지도 모르겠다.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_문학동네 중
소확행이 소개된 건 1994년 3월 백암출판사에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 수필집 3(랑게르한스 섬의 오후)>에서였더군요.
<무라카미 하루키 수필집 3>은 절판된 지 오래라 '소확행'을 발견하고 읽기까지는 제법 수고가 들어갔습니다.
분명 하루키의 작품이니 다시 출간이 됐을텐데, 같은 제목으로 출간된(랑게르한스 섬의 오후) 책이 없었으니까요.
찾아본 결과 '소확행'은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에 실려 있었습니다.
(<소확행>을 발견한 경험도 '소확행')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는 이전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와 <랑게르한스 섬의 오후>를 묶어 출간했습니다. 에세이 자체가 길지 않고, 거의 모든 하루키 에세이에 그림을 담고 있는 안자이 미즈마루의 작품이 실려 있어 편안하게 읽을만 했습니다.
안자이 미즈마루의 그림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는 저에게도 이 가격에(요즘 출간되는 하루키 에세이를 생각할 때) 이 정도 책을 사서 읽을 수 있다는 건 제법 만족스러웠고요.
조금 엉뚱하게도 이런 생각도 해봤습니다.
"랑게르한스 섬은 어디에 있는 섬일까? 지중해 어디쯤에 있는 온난하고 하늘이 맑은 섬일까?"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찾아봤죠.
랑게르한스 섬은 이렇게 쓰더군요.
Langerhans islets
보통 섬을 'island'라고 하는데 'islet'은 그 중에서도 아주 작은 섬을 의미하더군요.
그래서 어디에 있는 섬인지 감이 잡히시나요?
놀라지 마세요.
랑게르한스 섬은 섬은 섬이지만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내장기관의 이름이었던 거죠.
포유동물의 췌장에 섬처럼 퍼져있는 내분비샘의 세포집단이라고 합니다.
어느 지중해 바다의 섬을 떠올리던 때가 낭만적이기도 하고 좋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랑게르한스 섬이 섬이건 아니건 그건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들었을 때 평화롭고 낭만적이면 그만이니까요.
소확행이 유행처럼 번지는 요즘을 생각하면 하루키의 '나만의 특이한 사고방식'은 그 누구보다 앞선 감각을 증명하는 듯 합니다.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에는 하루키의 감각이 돋보이는 단어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러닝맨'이죠.
'러닝맨'이 등장하는 에피소드 제목은 <워크맨을 위한 레퀴엠>입니다.
마라톤과 달리기를 즐기는 하루키는 '워크맨'을 애용했는데, 자신은 걷는 사람이 아니라 뛰는 사람이기에 자신이 달고 뛰는 '워크맨'은 워크맨이 아니라 '러닝맨'이라는 거였습니다.
유명한 예능프로그램인 '런닝맨'의 슬로건이 '걷지 말고 뛰어라'라면서요.
그렇지 않겠지만 하루키 에세이에서 가져온 이름과 슬로건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하루키가 에세이에 쓴 소확행은 지금 흔히 즐기려 하는 소확행과는 많이 다르게 느껴집니다.
서랍 안에 깨끗한 팬츠가 잔뜩인 것만으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을테니까요. 혹시 그 팬츠가 명품이라면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세상인 거죠.(뭐 나만의 생각이어도 좋겠습니다)
사실 오늘은 작은 행복을 발견하기 어려웠습니다. 하루 종일 통증과 싸웠으니까요.
별거 아니고 생사가 걸리지도 않았지만 안절부절 못하게 하는 통증이 있습니다. 치통이나 요통처럼 어떻게 할 수 없는 통증들요. 하지만 이 밤, 이렇게 엎드려 글을 쓰는 순간순간에 행복을 느낍니다.
곧 잠이 찾아 올 거고, 제게는 편안히 잠들 수 있는 크지 않지만, 작지도 않은 공간이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