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 밤, 왜 책상 앞에 앉았는지 이유는 기억에 없다. 그냥 앉았을테지.
그러다 한 달도 전에 샀던 책에 딸려온 사은품 상자를 발견했다.
상자를 봉하는 스티커를 떼다 문득 '이걸 살려서 어딘가에 붙여볼까?' 싶어졌다.
떼는 도중 찢어지거나 했더라면 그대로 버렸을텐데, 처음부터 떼는 게 아니라 찢을 수도 있었을텐데, 우연히도 처음부터 찢지도 않았고, 도중에 찢어지지도 않는 상태로 이어졌다.
떼고 보니 책상 위에 달력이 있었다.
마침 2월 28일 밤.
2월 마지막 날을 기념해 달력에 붙이기로 했다.
기왕에 붙일 거라면 잘 붙이고 싶었는데, 붙이고 보니 기울어 있었다.
'바로 잡을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뭉뚱그려서 그냥, 그러지 말기로 했다.
기울게 붙인 스티커 한 장이 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술에 잔뜩 취해 똑바로 걸으려 애써본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게 하나 있다.
똑바로 걷고 있다는 생각이 똑바른 생각은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 여지, 현실.
바로 걸으려 애쓸수록 점점 취기가 올라 오히려 비틀거리며 걷게 되는 일도 있다는 걸 말이다.
사진 속 스티커는 어느 쪽으로 기울어진 걸까.
왼쪽일까, 오른쪽일까.
표준국어대사전은 '기울다'의 첫째 의미를 '비스듬하게 한쪽이 낮아지거나 비뚤어지다'로 적고 있다.
'한쪽이 낮아지'기만 하는 의미로 보면 스티커는 왼쪽으로 기운 게 맞다. 하지만 '비뚤어지다'를 생각하면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게 아닐까. 왼쪽에서 보면 오른쪽이 위로 올라가서 기운 게 되고 오른쪽에서 보면 왼쪽이 내려가서 기울지 않았는가 말이다.
무슨 생각에든 쉽게 골몰하는 성격은 많은 순간 비뚤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을 시전해왔다. 솔직히 피곤한 날도 있지만 지금 그만두면 그동안 애써온 일들이 의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만두기 쉽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바로잡을 수 있다는 가능성과 바로잡아야 한다는 의무감은 뭐든 바로잡으려는 발버둥으로 이어졌다. 말, 잔소리가 늘고, 불만이 많아지고, 무력감도 늘어갔다. 더 많이 애쓰고 노력할수록 더 크고 깊은 무의미로 만들어진 미로에 갇힌 듯 막막함과 마주해야 했다.
이건 불합리하다.
불합리를 넘어 부조리하지 않은가.
단지 이치에 맞지 않는 게 아니라 이치를 발견할 가능성조차 없는 게 아닐까.
사실, 대답은 어디에나 있었다.
예를들면, 이런 데에.
매일 몇 분이라도 펜으로 그리는 연습을 해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게 지난 해 12월 말이니 벌써 두 달째다.
이 그림에서 '문제'를 찾아보자.
'실력이 문제네.' 뭐, 그런 부분도 문제가 될 수는 있겠지만 시간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에 실력을 문제 삼기는 어렵다.
스케치 전에 항상 사각형을 그린다.
이 안에 뭔가를 그리겠다는 의미이자 제한의 의식 같은 거다.
첫번째 문제가 거기서 생겼다.
오른쪽 선이 터무니 없이 안쪽으로 기울어 버린 문제.
나는 이 '문제'를 얼마동안이나 붙들고 있었을까?
예전이었다면 '또 실수했네', '시작부터 실패다'라며 말도 안 되는 자책으로 시작했을 거였다.
반듯한 사각형을 그리고 싶었는데, 게다가 그리려는 대상도 반듯반듯한 사각형으로 가득한데 이런 시작이라니.
그런 생각을 했을 거라는 거다.
"어, 비뚤어졌네."가 전부였다.
자책이나 반성하는 마음은 없었다.
'애초에 그럴 일이 아니잖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그럴 때가 있었다.
작은 실수, 바로 잡을 수 있는 사소한 부분을 치명적이라고 믿으며 비관하게 되는 순간이.
시작부터 기울더니 드로잉을 끝냈을 때는 온통 기울어 있었다.
그러나 나쁘지 않았다.
미술치료라는 게 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혼자하는 연습에도 비슷한 효과가 있을 줄이야.
우연히 받은 펜과 스케치북이 드로잉을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왜였는지 매일 조금씩 그려볼까 마음먹게 된 날이 있었다.
'연습'이기에 성공이나 실패에 얽매이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생각없이 그리고, 그리며 생각하고, 의외의 사실을 발견하고,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과정이 즐거웠다.
모든 선이 반듯할 필요는 없다.
모두가 반듯한 선을 그릴 수도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한 반듯함을 정의할 수 없기에 스스로를 그 안에 가두려 할 필요도 없다.
알 수 없음, 무지, 불확실성의 이면에는 가능성이 숨어 있다.
자유로움과 자연스러움.
삶은 이론과 논리가 아니다.
그러니 우연이 가져다 준 가능성을 즐기는 데서 시작해도 괜찮다.
거의 모든 건 우연히 시작된다.
그리고 그 우연을 가져오는 건 언제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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