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생각해 봅시다.
“지상에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간절한 행복의 조건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마다 다른 답을 내놓겠지만 제 대답은 역시 이겁니다.
“살아있음.”
인간다운가, 풍요로운가, 영광스러운가, 비참한가, 가난한가를 따질 필요도 없이 살아있음, 그 자체가 다행스럽기만 합니다.
흐리거나 맑거나, 황사와 미세먼지로 뿌옇거나 관계 없이 뜨고 지는 해를 보고, 밝아지고 어두워지는 하늘을 마주할 수 있음이 감사하기만 합니다.
오늘, 이 모든 실감은 상실에서 왔습니다.
절대적이고 영원한 상실, 죽음에게서 받았죠.
2018년 5월 22일(미국 현지 시각), 작가이자 인간 필립 로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퓰리쳐상, 맨 부커상 인터내셔널 등 유명 문학상을 받고도 노벨 문학상과는 끝내 인연을 맺지 못하게 됐죠. 세상을 떠난 마당에 노벨 문학상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마는, 만년에 절필 선언, <네메시스>를 마지막으로 작품 활동을 중단한 건 독자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우연인지, 지난 주말 <에브리맨>을 읽었습니다.
정말 우연의 우연으로 한 남자의 삶과 죽음,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질투가 담긴 이야기.
필립 로스의 사인, 울혈성 심부전.
<에브리맨>의 주인공 역시 심장과 혈관 계통에 문제를 겪었고 자주 수술을 받아야 했으며 71세라는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직접적 원인이 됐습니다.
그보다 14년을 더 살았다고는 해도, 필립 로스의 삶 역시 <에브리맨> 속 남자의 만년처럼 종종 치솟는 두려움과 질투와의 지난한 전쟁 같지 않았을까.
마침내,
“심장마비. 그는 이제 없었다. 있음에서 풀려나,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처음부터 두려워하던 바로 그대로.”_<에브리맨>
필립 로스는 자신의 소설 속 남자가 되었다.
소설 속 남자의 딸의 마지막 말,
“아, 결국 이렇게 되네요.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요, 아버지.”_<에브리맨>
우리가 필립 로스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그가 남긴 이야기를 읽는 일, 기억하는 일은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아있는, 살아있는 우리를 위한 일이기에.
오늘의 예기치 못한 커다란 행복은 누군가의 죽음에서 왔다. <에브리맨>, ‘보통사람’.
인간은 예외 없이 죽는다. 때가 되어 죽는다기 보다 죽게 되어 죽는다. 앞서 왔다고 먼저 죽지 않으며, 나중에 왔다고 늦은 죽음을 보장받지도 않는다.
살아 있는 동안에 삶을 기뻐하기 보다 죽음을 염려하며 두려워하고, 스스로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야 깨닫게 되는 일이 나에게는 닥치지 않기를.
나는 어떻게 죽게 될까?
그런 걸 생각하기엔 이르다 말할지 모르지만 내게도 생각해둔 최후 한 장면 정도는 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 외로움으로 죽게될 거다.
곁에 누가 없어서라거나 혼자라서 느끼는 외로움이 아닌 인간 존재의 한계로서의 외로움에 떨며 마지막을 기다릴 거다.
그렇기에 오늘의 나는 작고 위태롭지만 확실한 행복을 실감한다. 공기를 마시고, 허기를 느끼고, 더위에 지치거나 추위에 떨며, 졸음을 참고, 생을 견딜 수 있는 행복.
한 번 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영면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