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가책방 Jun 17. 2018

[북리뷰] 우리는 예외 없이 기적과 만난다

'메리고라운드' 회전목마는 급변한다

<서커스 나이트>_요시모토 바나나/민음사


고민이야 늘 있지만 요즘들어 깊어진 고민이 하나 있다. 

새로운 사람, 사람들과 만남이 나날이 귀찮아만 간다는. 

처음 하는 고민도, 새삼스러울 깊어짐도 아니지만 '사회 생활'을 해야만 하는 나이, 그것도 원만히 해내야 하는 나이에 골몰하기엔 부담스런 고민이다. 


 숨을 쉬듯 허기가 지고, 허기를 달랠 밥을 먹고, 잠에서 깨는 순간부터 피로를 느끼고, 피로를 이유로 이런 저런 일을 모면하는 일상. 시간은 부쩍부쩍 큰 걸음을 걸어서 어제는 자꾸만 멀어지고, 내일은 오늘이 되고, 1년 2년을 간단히 살아낸다. 


 그 시간을 혼자 보내지는 않았겠으나, 남은 것도 기억도 거의 없으므로 혼자 보낸 것과 얼마나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기적이 필요한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어쩌면 매순간이 기적이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평범하게, 아무렇지 않게 여기게 된 지금의 시간이 어쩌면 기적의 산물이었음을 시간이 흐른 후에야, 때로는 많은 시간을 흘려 보낸 후에야 깨닫게 되는 게 우리 인간들이 공유하는 몹쓸 병은 아닐까.


 서커스 나이트. 

민음 북클럽 회원으로, 그 중에서도 첫 독자가 되기를 신청한 사람으로 이 책과 만났다.

 이 만남은 어떤 의미에서 일어나기 힘든 일, 일어날 수 없었을 일이 일어난 경우, 그러니까 기적이다.

굳이 구질구질해지자면 새로 출간된 책을 홍보하고 알리려는 출판사의 욕심과 누구보다 빨리, 심지어 돈을 지불하지 않고도 책을 읽어보려는 독자의 욕심이 상호충족됐을 뿐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런 게 기적이다. 일어날 수 없었을 지도 모를 일이 일어났고, 그 일이 일어남으로써 그 다음의 무엇 혹은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는 일. 기적이란 그렇게 일상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이라고 상상할 수 없는 두께, 무려 400쪽이 넘는 책에 단 한 편의 이야기가 담겼다. 기억 속 바나나의 소설은 200쪽 안팎이었으며, 가까운 날에 읽은 <바다의 뚜껑>도 비슷했다. 그 두 배나 되는 책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겼을까. 


 줄거리는, 이랬다.

 주인공 사야카는 사이코메트러다. 사물에 담긴 기억 혹은 감정을 읽는다. 몇 년 전 남편을 떠나보내고 딸과 함께 지내고 있다. 마당이 있는 2층짜리 주택, 아래 층에는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산다. 하루는 묘한 편지를 받는데, 마당에 심긴 히비스커스 나무 아래에 뭔가를 묻었는데 파 갈 수 있느냐는 전에 살던 사람의 메시지다. 우연일까, 편지의 발신인은 오래 전 사귀었던 전 남자친구다. 기이한 모양으로 굳어버린 왼손의 상처와 연결된 과거의 주연이 편지 하나로 현재와 이어진다. 소설은 그 이후의 이야기다. 히비스커스 나무 아래서 파낸 건 어린 아이의 뼈였고, 그 뼈를 계기로 전 남자친구 이치로와 재회 하며, 이해심과 사랑이 많은 시어머니의 응원과 천진난만한 딸 미치루의 활약으로 오래 묵혀 두었던 아픔, 상처가 치유되어 간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이다. 

여리고 따뜻하지만 단단하고 강인한 사람들. 저마다의 상처로 상대를 힘들게 하거나 상처를 늘리는 모난 행동보다 서로의 상처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가는.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쏟는 등장 인물들의 모습에 '으응?/하고 고개를 갸웃하게 되면서도 '그렇게 되다니 다행이군'하고 안심하게 하는 편안한 이야기. 불행이 특별하지 않게 되는 묘한 위안을 담은 이상한 사람들의 일상.


  관계와 연결을 생각꺼리로 삼은 지는 오래다. 대부분이 이어갈 지, 끊어낼 지,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의 고민이었다. 관계의 문제는 누구나 하는 고민, 답을 얻고자 하는 문제다. 논리, 이성으로 접근하거나 관계의 기술로 풀어 보려는 사람 들을 위한 책도 많다. 지금까지 나온 책들에 다 담지 못했는지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쓰고 있을 거고, 누군가는 인쇄를 하고 있을 거며, 누군가는 쓸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사람들은 자꾸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이 모든 걸 다 해내려고 한다. 세상도 같은 말을 한다. 관계가 잘 안 풀리거나 안 되면 스스로를 탓하게 하고 돌아보라고 한다. 인연이니 운명이니 기적이니 하는 증명 불가능한 상황에 기대려고 하면 미신이니 무책임이니 하며 혼내려 든다. 


 바나나의 접근 방식은 조금 다르다. 우리가 사회와 관계 속에서 망각하고 소홀히 여긴 인연의 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움직임, 인식을 초월한 기적을 긍정하는 거다.

 사람은 변한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 알아가는 동안 달라진다. 새로 배우는 게 있지만 잊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또 변한다. 자신이 변했다는 걸 알아 차리거나 모르고 살거나와 무관하게 변해 간다. 

 

 "나는 변하지 않아!"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에게는 이 문장을 전하고 싶다.

"나는 다르다고 생각하지 마. 주위 탓으로 돌리는 게 가장 나쁘지만, 나만은 괜찮을 거라는 생각도 틀린 거야." <서커스 나이트> 273P

10살 즈음의 딸 미치루에게 엄마 사야카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아이는 물론 이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해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미치루는 조숙한 아이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어린 아이는 잘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어른의 생각이 오히려 편협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오히려 어릴 때 더 깊이 보고, 느끼고, 받아들이게 되는 일도 흔하니까.


 가끔 이야기에서 나의 일부 혹은 과거의 나와 만난다. 이 소설에서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자유로운 것은 좋지, 아주 좋은 일이야. 그러나 아무와도 이어져 있지 않거나 언제 끊길지 모르는 만남만 있는 인생은 자유롭다 할 수 없어.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혼자 살아온 네게는 그런 면이 좀 있어. 혼자 어둠 속에 있다가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불안정함이. 그게 어쩌면 매력으로 이어질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매력은 버려도 괜찮다. 번거롭더라도 이어져 있으렴. <서커스 나이트> 189P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온 셈이다. 사람과 관계의 고민 말이다. 

어떤 특별한 불운이 아니더라도 혼자 있기를 선택하는 경향이 생길 수 있다. 혼자가 편하다는 말은 혼자가 좋다는 말과 동의어가 아니다. 혼자가 좋지 않더라도 관계의 번거로움을 견디는 일보다 수월하다는 의미도 된다. 관계를 잇고 유지한다는 말은 거기에 그만큼 관심과 노력을 기울인다는 이야기가 된다. 관심과 노력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일말의 혹은 많은 책임을 느낀다는 의미다. 책임이 생기면 훌쩍 사라질 수 없다. 자유를 잃은 듯, 갇힌 듯 느끼게 되기도 한다. 

 응지 식물이라도 햇빛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건 아니다. 거리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모든 외부 세계를 배제함으로써 자유를 얻을 수도 있다. 고립된 자유로도 만족할 수 있다면 그렇다. 하지만 인간은 관계 없이 살 수 없다. 관계에 질식할 지경까지 견뎌서는 안 되지만 메말라서도 안 된다는 거다. 안정 속의 불안정은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하지만 불안정 속의 불안정은 인간을 극단으로 내몰기 쉽다. 


 <서커스 나이트>에는 초월적인 믿음이 담겨 있다. 우리가 상식이라고 하고, 논리와 과학으로 증명하기 익숙한 세계 이면이 녹아있다. 

 이런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한다.

 한 사람의 삶은 자기만의 것이 아니며, 모든 걸 다 안다는 지금의 확신을 뒤집어 놓을 경험은 언제든지 있을 수 있고, 인연에는 적거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며, 기적은 사람에게서 온다고.


책을 덮으며 떠올린 생각은 이런 거였다.

"다음에는 발리에 한 번 가봐야겠다. 
나는 착한 사람이니까 착한 사람 꿈에 찾아온다는 성스러운 동물 바롱을 만날 수 있겠지. 
아, 그런데 안 오면 착한 사람이 아니게 되는 건가? 
뭐, 그건 또 그것대로 괜찮겠군."


 서커스 나이트, 기적을 만나는 밤.

혹은 기적을 믿어보고 싶은 밤. 

너무 심각해지지 말자.

매거진의 이전글 산산이 부서진 사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