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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Jun 18. 2018

[북&모임리뷰] 고전의 추악한 민낯

포리스트 카터는 KKK에 거짓말쟁이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_포리스트 카터/아름드리미디어

인디언 혼혈 소년 작은 나무의 어린 시절을 따뜻하게 그린 소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의 작가 포리스트 카터는 백인우월주의자 KKK단의 리더로 활동했다. KKK단 활동 중 사람이 죽기도 해서 경찰의 추격을 받기도 했다. 자전적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포리스트 카터의 혈관에는 체로키 인디언의 피가 흐르지 않았다. 본명은 아서 카터. 따뜻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쓴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행위를 부정한 위선자였으며, 냉혈한이었다.


2018년 6월 14일, 문학 읽기 네 번째 모임이 있었습니다.

함께 문학을 읽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갖고 싶다는 생각으로 3월부터 시작했죠. 처음에는 여러 권의 목록을 공유하고 한 권을 읽고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세 번째 모임에서 한 권을 같이 읽어보면 어떨까 하는 의견이 나왔고 함께 읽어볼 책은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로 정해졌습니다.


 포리스트 카터가 어떤 인간이었는지 알고 있었기에 다른 책으로 하자는 의견을 냈습니다. 하지만 작가에게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궁금하다는 의견, 예전에 다른 사람이 인생 책이라며 추천한 기억이 있다는 의견에 힘 입어 모험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내 영혼이 따뜻한 날들>을 읽고, 네 명이 모였습니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은 작가 사후에 새롭게 주목 받았습니다. 2007년에는 오프라 윈프리가 자신의 쇼에서 소개하기도 했죠. 한국에는 96년에 출간된 이후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아 재판을 거듭하며 꾸준히 팔렸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읽고, 감동하고,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거나 선물하기도 하면서요. 저 역시 그런 독자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다시 읽을 때마다 좋은, 고전이었죠.


 이야기의 줄거리는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읜 체로키 인디언 소년 작은 나무가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생활하며 가르침을 얻고, 지혜를 배우며 성장하는 몇 년 간의 생활입니다. 백인 사회, 기독교, 자본주의, 인종 차별이 만연한 세상에 비판적인 시각과 그와 대비되는 체로키 인디언의 소박하고도 강인한 삶을 따뜻하게 그려 담았습니다.


 모임에 참여한 네 사람은 저마다 다른 상태에 있었습니다.

저는 포리스트 카터의 정체를 모르고 즐겁고 감동적으로 읽었다가, 알게된 이후에는 갖고 있던 책은 치웠고 기회가 닿는대로 저자의 정체를 폭로하고 다녔으며, 사지 말기를, 읽기 말기를 권하고 다니는 상태였습니다.

한 분은 오래 전에 사서 절반쯤 읽은 상태였고, 인터넷에서 포리스트 카터의 정보를 찾은 후 나머지 반을 읽었습니다. 끝까지 읽을 수는 있었지만 감동은 반감된 상태라고 하셨어요.

한 분은 정보를 모르고 너무 재밌게 읽었다고 하셨습니다. 15,000원 이나 하는 새 책을 사기도 했죠. 우리는 그래도 재밌게 읽기라도 했으니 책 값이 덜 아깝겠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쓰게 웃었습니다.

마지막 한 분은 포리스트 카터의 정체를 알고 책을 읽기 시작하셨습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있었지만 끝까지 읽을 수 없었다고, 공감은 커녕 작가의 의도가 뭐였는지 혼란스러워 읽기가 너무 힘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작가의 진면목을 알고난 후에는 도저히 처음처럼 감동을 느끼거나, 애정을 느끼기 어려웠죠.

 

"작가와 작품을 나누어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물음이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그럴 수 있었으면 좋았겠다, 얼마 동안은 작가는 잊고 작품의 좋은 점만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 수록 어려워져서 이제는 그럴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됐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도무지 진실이라고는 없는 이야기에, 작가의 의도조차 선하다고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백인우월주의자 집단에서도 악랄하기로 소문난 그룹에서 활동하면서, 섞이지도 않은 체로키 인디언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자신이 했던 행위와 다르지 않은 인디언들의 '눈물의 여로'를 감상적으로 그리고, '이해와 사랑은 같은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끄적이면서 이해하려고도, 사랑하지도 않았던 위선자의 거짓에서 어떤 감동을 상상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소설과 작가 이야기에서 소설 속 작은 나무를 키우는 체로키 인디언 할아버지, 할머니의 교육 방법 이야기로 넘어갔습니다.

 교육에 관심이 많고, 더 나은 교육을 고민하는 참여자 분은 당시 미국 사회가 교육을 통해 만들려는 인간상이 산업 구조에 맞게 단순 작업이 가능한 숙련된 노동자(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 언급)였기에 소설에서 작은 나무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떠나 고아원에 가야했던 거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어리지만 한 사람의 인격체이자 독립된 존재로 존중받던 체로키 인디언의 교육은 철저하게 부정당합니다. 자연 그대로의 풍경, 예를 들어 동물의 교미를 직접적으로 묘사하면 부끄러운 일을 한 것이 되어 벌을 받고, 이미 알고 있다고 해도 자신들이 가르치는 것과 조금이라도 다를 때는 자신들의 인식과 같아질 때까지 가르침을 강요합니다.


 한국 사회가 부딪힌 교육의 한계와 혼란과 닮은 풍경입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는 정규 교육의 딱딱하고 구조화된 경험을 하지만, 사회에서는 유연하고 창의적인 인재를 요구합니다. 놀거나 즐길 수 있는 시간은 학원과 과외에 빼앗깁니다. 자율은 없고, 시키는 곳에 가서 시키는 것을 배우고 익혀야만 합니다. 무한 경쟁 시대, 누구와도 경쟁할 필요 없던 시절은 환상 속에만 존재합니다.


 종교 이야기도 조금 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다른 종교의 신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디언들이 존중하는 자연의 신, 초월적인 존재들 모두가 부정당하죠. 전도라는 명목으로 반강제의 개종도 이루어집니다. 소설에서는 기독교의 변질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유일한 신이 아니라 마치 목사를 믿는 듯이 보이는 기독교 신자들을 비판하죠.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이재록 목사 사건입니다. 지금은 조용하지만 성폭력의 희생자가 된 신도들은 하나 같이 두려웠다고 말했습니다. 목사의 의사, 뜻을 거스르는 게 신의 뜻을 거스르는 거라는 믿음이 두렵게 했다고 말입니다.

 

 일부의 경우지만 종교는 맹목적이 되기 쉬운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증명하거나 부정하는 것 모두 어렵기 때문에 치밀한 논리와 강력한 주장에 이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체로키 인디언들은 지혜를 발휘합니다. 맹목적으로 믿거나, 따르거나, 두려워 하지 않고 조화를 찾으려 노력하죠.


 다시 이야기는 주제를 바꿔 일로 옮겨 갔습니다.

소설 속에 이런 장면이 있거든요.

꿀벌인 티비들만 자기들이 쓸 것보다 더 많은 꿀을 저장해두지. 그러니 곰한테도 뺏기고 너구리한테도 뺏기고 우리 체로키한테 뺏기기도 하지. 그놈들은 언제나 자기가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쌓아두고 싶어하는 사람들하고 똑같아. 뒤룩뒤룩 살찐 사람들 말이야. 그런 사람들은 그러고도 또 남의 것을 빼앗아오고 싶어하지. 그러니 전쟁이 일어나고, 그러고 나면 또 길고 긴 협상이 시작되지. 조금이라도 자기 몫을 더 늘리려고 말이다. 그들은 자기가 먼저 깃발을 꽂았기 때문에 그럴 권리가 있다고 하지. 그러니 사람들은 그놈의 말과 깃발 때문에 서서히 죽어가는 셈이야. 하지만 그들도 자연의 이치를 바꿀 수는 없어.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중

언제부턴가 우리는 '충분함'의 경계를 잃어버렸습니다. 없는 사람은 없어서, 가진 사람은 더 많이 갖고 싶어서 분투합니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이 없는 사람의 몫까지 빼앗아 가는 일도 흔합니다. 갑질, 젠트리피케이션, 등등 늘어놓자면 길고도 긴 목록이 생길 정도죠.

 얼마나 가져야 충분한가요?

인간이 파괴한 자연을 과학이 회복시킬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오래 전부터 자연을 파괴하고 거스르는 인간을 위로하고 정당화 하는 만능의 주문으로 작용해왔습니다. 하지만 자연이 파괴되었을 때 사라지는 건 지구가 아닌 인간이 될 거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지혜가 필요한 까닭입니다.


아서 카터였던 포리스트 카터는 오래 살지는 못했습니다. 벌 받은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군가를 괴롭게 한 사람에게는 그에 합당한 무언가를 짊어지게 하는 게 이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백인우월주의자 논란에 휘말리자 자식들을 조카라고 하면서까지 부정했던 기만과 위선.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을 추천했던 오프라 윈프리는 진실을 알고난 후에 추천을 철회했습니다. 자신은 작가와 작품을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이유에서였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마음일 겁니다.


리뷰와 모임 후기를 겸한 글을 마무리 하기 전에 출판사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내 영혼이 따뜻한 날들>을 출간한 아름드리미디어는 '1991년 ABBY상 수상작 국내독점계약'이라는 소개처럼 일찍, 독점해서 국내에 판매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최초 출간 당시부터 백인우월주의자 논란에 휩싸였던 작품을 출간, 판매하는 출판사가 20년 넘는 시간이 흐르도록 작가의 진면목을 모르고 있을 수 있을까요.

구글에 작가 이름을 검색하기만 해도 드러나는 추악한 과거를 몰랐을까요.

 작가 이력에도, 책 소개에도, 책 어디에도 진실은 없고 거짓만 가득합니다.

책을 팔아야 하는 출판사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한국인이지 미국인이 아니고, 인디언도 아니니 다른 나라의 어두운 역사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역사가 아니더라도 아픈 건 아픈 겁니다. 슬픈 건 슬픈 겁니다. 그런 이유로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꾸준히 판을 바꾸며 가격이 올라가고, 마침내는 양장본으로 출간되어 띠지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졌습니다.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지던 작은 고전, 이제 오래오래 간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독자에게는 읽을 것을 선택할 자유와 진실을 알 권리가 있습니다.

만약 진실로 모르고 있는 게 아니라면 이 상황을 기만이 아닌 다른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따뜻한 감동을 느꼈던, 정말 사랑했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고통의 비명을 지르게 하고,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기며, 생명을 앗아가는 피를 흐르게 했던 손으로 쓴 것이었다는 생각은 소름끼치는 두려움과 슬픔을 느끼게 합니다.

 

 한 때 말도 안 되는 비리를 저지른 사람, 잔혹한 일들에 앞장 섰던 사람들이 벌을 받는 자리에 서면 같은 말을 합니다.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고요.

그런 날이 왔습니다. 이제는 그만둬야 하는 때라는 걸 받아들이세요.


 그럼에도 문학 읽기는 계속됩니다.

다음 달, 7월에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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