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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Jun 04. 2018

산산이 부서진 사월

모든 것이 부서지고, 부서진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맨부커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 작품을 이어서 읽고 있다.

얼마 전 타개한 필립 로스 <에브리맨>, 벨라 타르 감독의 7시간 30분짜리 영화가 된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사탄탱고>, 치누아 아체베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이스마일 카다레 <부서진 사월>, 네 작품을 먼저 읽었다.


 총평하자면 "문학은 취향이구나"하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됐다.

더하여 "취향에도 나름나름의 이유가 있구나"하기도 했다.

 취향이란 존중받아야 하며, 좋고 싫음에는 뚜렷하고 구체적인 이유(타인이 납득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더라도)가 있다는 거다.


 <에브리맨>은 한 남자의 일생을 이야기 한다.

<사탄탱고>는 한 마을, 쇠락한 도시를 이야기 한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한 부족, 한 문화, 한 사람을 이야기 한다.

<부서진 사월>은 다시 한 남자의 이야기다.


네 작품에는 공통점이라고 볼 수 있는 게 있다. 모든 이야기에 '죽음'이 등장한다는 거다. 등장 정도가 아니라 '죽음'이 주연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비중을 차지한다. 

 부서지거나 무너지거나 파괴되거나 파괴 당하거나 파괴 하는 이야기들.

따로 떼어서 읽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공통점, 각각의 소설들은 필연적 파멸 혹은 마지막을 담고 있다. 

이 마지막은 무지 혹은 무력, 불가항력의 거대한 힘이 작용한 결과다. 


<에브리맨>은 평생 죽음을 두려워 하던 한 남자, <사탄탱고>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무엇에 도전하거나 시작하는 게 불가능한 무력한 사람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영국의 진격으로 파괴되는 아프리카 부족 사회, <부서진 사월>은 카눈에 절대복종하는 알바니아 산악지대 사람들의 피의 복수 전통에 휩쓸려 희생되는 한 남자. 이들은 모두 무력하기만 하다. 



 네 작품에서 재밌게 읽은 건 <에브리맨>과 <부서진 사월>이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흥미로운 소재과 전개를 갖추었지만 아프리카 부족의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무자비한 행위들에서 반면 교사 외의 반발 섞인 교훈 외에 다른 무엇을 느껴야 할 지 알지 못했다. 번역의 문제랄지, 편집의 문제랄지 가독성이 떨어지는 부분도 크게 작용했다. <사탄탱고>는 읽기 자체는 수월했고 전개 방식도 독특했다. 상징이라고 할까, 인간의 무력함 혹은 무기력함을 보여주는 과정도 좋았다. 하지만 어린 소녀와 고양이를 희생시키는 방식이 거북했고 의미심장했던 만큼 어리둥절했던 결말이 찝찝하게 남았다.


좋고 싫었던 데에는 이처럼 이유가 있다.

설명 가능하며 모호하지 않고 구체적인 이유들이.

많은 작품들이 문학상 수상작품이라는 간판을 달고 출간된다. 

이해하지 못하거나 싫다고 말하려고 하면 무지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될까 겁내게 한다.

책을 적게 읽은 사람은 적게 읽었기에 섣불리 판단을 꺼내놓지 못하고, 제법 읽은 사람들은 그 정도 읽고도 수준이 낮다는 이야기를 들을까 저어하는 거다. 

 그런 일이 벌어질 수는 있다. 

사람이기에 그럴 수 있다. 

중요한 건 그 다음이 아닐까.

그럼에도 계속 읽어나가는 일 말이다.


 취향은 변한다. 

경험과 지식, 감정과 상황에 따라 급격히 변하기도 한다. 

논리나 이성, 근거 없이도 달라질 수 있다. 

취향이란 기분을 탓해도 좋은 게 아닐까.


 분명 욕심은 있다.

더 많이 보고 싶고, 느끼고 싶고, 이해하며 들여다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지적이면서 감정적인 갈망이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 모든 갈망은 목숨을 좌우하는 허기나 갈증과 달리 반드시 채워지지 않아도 되는 종류의 문제다. 


 같은 작품을 읽은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움은 서로의 취향과 생각, 감정의 근거와 방향을 가늠하는 데 있다. 누가 더 많이 알고 이해하는지에 감탄하거나 부러움을 느끼거나 질투하거나 화를 내는 건 작고도 소소한 재미다. 


 파괴 하거나 파괴 당하는 이야기를 많이 쓰고 읽는다.

좋아해서라기보다 그런 사건, 상황, 일들이 그만큼 자주 벌어지는 탓이리라.

그러므로 전쟁의 참혹함이나 가혹한 율법, 스스로는 무엇을 선택하거나 시도할 수도 없는 무력함에 공감하지 못한다는 건 오히려 긍정적인 신호일 수 있다. 아직 그런 상황을 겪거나 견디지 않아도 괜찮았다는 이야기일 수 있기에. 


 아는 게 힘이라고 하지만 아는 게 반드시 좋은 게 될 수는 없다. 어떤 일들은 모르고 살아도 괜찮기에.


부서지는 게 나쁘기만 한 건 아니라는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다.

어떤 건 반드시 부서져야 하며, 부서지는 과정을 견디고 나면 반드시 더 나아짐을 확신한다. 


 이미 다 들어 본 이야기로 마무리 하려고 한다.

알은 스스로 깨면 병아리가 되지만 깨어지면 후라이가 된다고 한다. 

웃기지도 않는 데서 진리를 발견하기도 하는 게 삶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삶도 죽음도 처음이라 서툴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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