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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May 03. 2018

삶도 죽음도 처음이라 서툴기 마련이다.

나도, 너도, 우리도 그러하다


*물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베스트셀러, 특히 소설, 그중에서도 가볍고 말랑한 작품에는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 편이다. 독서 모임이 좋은 건 읽지 않았을 책을 읽는 기회를 가져 오기 때문이다. 사실 그보다 더 좋은 건 같은 이야기를 읽고 다르게 보고 생각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거다.


 <오베라는 남자>는 유명한 베스트셀러다. 영화화 됐고, 개봉도 됐다. 흥행 여부는 알지 못하나 영화도 감동을 주는 이야기로 잘 만들어진 듯 하다. 


 꽉막힌 데다 고지식하고, 자기 주장 강하며, 무례하기까지 한 남자. 

세상이 보는 오베라는 남자의 모습이다. 

 정말 그럴까? 그렇게 생각해도 말릴 수 없을 행동을 서슴 없이 저지르는 남자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베라는 남자가 밉지 않았다. 물론 막무가내로 다그치고 윽박지르는 면은 좀 고칠 필요가 있어 보이지만 말이다.


 오베는 6개월 전에 아내와 사별한 59세 스웨덴 남자다. 건장한 체격에 나이가 들었지만 어지간한 젊은 남자보다 힘이 세다. 오베는 아내, 소냐를 너무나 사랑했다. 소냐를 만나기 전에는 살아있었다고 말할 수 없었고, 마찬가지로 소냐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산다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오베는 자살하기로 한다. 소냐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소설은 오베의 일상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아침 6시 15분 전에 일어나 살고 있는 주택 단지의 곳곳을 돌며 점검하는 일로. 

 오베라는 남자는 자신으로 인해 누군가가 피해를 입는 걸 극도로 꺼리는 사람이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소냐를 잃고 크게 상심했음에도 월요일이라는 이유로 회사에 출근할 정도다. 6개월이 지나도록 소냐를 따라 가지 않은 이유도 회사 때문이었다. 그런데, 마침내 회사에서 사직을 권한다. 오베는 이미 주변을 정리해둔지 오래다. 부채도 없고, 장례 절차와 재산 문제도 이미 다 적어뒀다. 

 오베는 거실 중앙에 고리를 박고 밧줄을 걸어 목을 맬 생각이었다. 이웃집에 터무니 없이 무례하고 답이 없는 가족이 이사오기 전까지는. 오베는 거듭 방법을 바꿔가며 자살을 시도하고 실행한다. 그러나 번번이 그 이웃집 여자가 방해를 한다. 마치, 자신이 자살할 생각이라는 걸 아는 듯이.


 비밀도 아니지만 오베가 첫 번째 방법으로 선택한 '목 매어 죽기'가 밧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실패한 건 파르바네와 패트릭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오베는 자살하지 못한 게 아니라 자살할 수 없었던 거라는 이야기다.

 

 오베라는 남자는 무뚝뚝과 무례와 안하무인과 막무가내의 아이콘 같은 존재지만 소냐를 만났을 때 만큼은 달랐다. 소냐와 함께 한 시간 동안은 달랐다고 해야 더 정확하겠다.

 

 소냐는 예쁘고, 똑똑한 데다 매력까지 있는 여자다. 오베는 스스로가 소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소냐는 오베에게 호감을 느낀다. 그 이유가 하나는 아니겠으나 가장 결정적인 건 이거였을 거다.

'소냐의 말을 듣는 오베의 모습.'

소냐의 이야기를 듣는 오베의 모습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데이지를 바라보는 개츠비를 떠올린 건 우연이 아니었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세상 모든 여자들이 자신을 바라봐주기를 바라는 시선'으로 쳐다본다. 다른 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듯 오로지 자기 앞의 소중한 존재에게 모든 걸 바치듯한 눈으로 말이다.


 자신의 모든 걸 바쳐도 부족했던 소냐가 죽었다. 더는 출근할 직장도 없다. 친구도 자식도 없다. 오직 사랑하는 소냐의 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 오베에게는 그게 전부였다. 오베가 죽음을 미룰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다만, 성가시고 건방진 이웃이 이사왔을 뿐이므로.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다음 일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한다. 오베도 그랬다. 이야기는 계속 된다. 오베는 자살에 성공해 소냐 곁으로 갈 수 있을까?


전적으로 공감하는 건 아니지만 오베라는 남자에게 상당 부분 이입할 수 있던 이유는 나 역시 많은 원칙이 지켜지길 바라고, 지켜져야 한다고 믿으며, 지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원칙이란 세상이 부여한 게 아닐 수도 있다. 그래서 법이나 규칙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소신'이라고 하면 조금 더 의미가 가까워지겠다. 

 오베에게는 소신이 있었다. 나에게도 소신이 있었다. 지금도 조금 남은 소신이.


 나는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게 싫었다. 다른 사람이 내게 폐를 끼치는 걸 허락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요구했다. 나의 안전과 안락을. 사고 사망자가 질병 사망자 보다 많다던가? 왜 사고가 나서 사람이 죽거나 다치나? 조금이라도 줄일 수 없을까? 

 물론 대답은 '있다'다. 안전불감이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자신이 안전 불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 보인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신호를 위반해도, 무단 횡단을 해도, 아무 데서나 담배를 피우고, 쓰레기를 버려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듯 보이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정확히는 자신이 뭘 했는지, 뭘 하는지도 모르고 있는 듯 보인다. 그냥 하는 거다. 남이 하니까, 번거롭고, 귀찮으니까. 


 오베는 그런 사람들과 마주할 때면 원칙을 읊는다. 자기만의 원칙까지 강요한다.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납득하지 못하거나 무시하면 끝까지 관철한다. 답이 없다. 그러나 그런 상황 외에 오베가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없다. 


 깨진 유리창의 법칙은 작은 잘못을 고치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는 문제로 이어진다는 법칙이다. 담배 꽁초 하나가 버려져 있으면 또 다른 담배 꽁초 혹은 쓰레기가 버려질 확률이 높아진다. 작은 규칙을 어기는 사람을 방치하면 더 만은 사람들이 규칙을 어기게 되고 나중에는 어겨서는 안 되는 규칙까지 어기게 된다. 오베는 그런 혼란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혼란을 용납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꽉 막혀 있지만 오베가 지닌 미덕을(악덕은 제하고) 세상 사람들이 어느 정도 배워 따른다면 지금보다 조금 더 살만한 세상이 만들어질 거다.


 <오베라는 남자>는 가볍게, 뭉클하게, 감동을 받으며 읽기 좋은 소설이다. 우연의 일치 연속, 영화화를 의식한 듯한 설정, 너무나 착하고 순수한 사람들이 비현실적일 수는 있다. 그래서 소설이니까. 


 오베는 흑백의 세상을 살았다. 열정도, 행복도, 기쁨도 특별히 품거나 바라지 않았다. 소냐를 만나고 오베의 세상은 변했다. 소냐는 색깔이었고 오베는 소냐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했다. 삶이란 그런 거였다. 지극히 서툰 오베지만 회색인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는 색깔 속에서 어울리는 거였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모두에게 허락되는 건 아니지만 언제, 어떻게 죽을지 선택할 수도 있다. 절망할 수도 있고 희망을 품을 수도 있다. 그건 정해지지 않았다. 살아 있으면 살아갈 수 있는 거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거나 희망을 버리지 말라거나 하는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다. 적어도 나는 그런 일에 서툴기에. 내 안에, 우리 안에 빛이 없다고, 색깔이 없다고 바깥으로 통하는 문을 막고 창에 못질을 한 채로 절망할 필요는 없다. 그런 절망은 오만이다. 내가 다 가졌다고 믿거나, 나는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실수의 다른 이름이 오만이라는 거다. 


 누구나 오베라는 남자의 모습 중 하나는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니까 우리가 오베다. 우리는 세상을 처음 살고 있고, 처음으로 죽을 것이다. 서툴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다. 나도 서툴고, 너도 서툴고, 우리도 서툴기에 서로 도와도 의미가 없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있다. 


 스스로를 잘 알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저지르는 실수는 자신을 모르고 살아가는 거다. 자신에게 있을지 모르는 가능성, 타인과의 우연하지만 필연적인 화학작용의 계기를 혼자서는 영원히 발견하지 못한다.


 오베는 더 쓸쓸하고 외로운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소냐가 없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오베가 없었다면 소냐의 삶도 덜 충실했을지 모른다. 자신의 모든 걸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온전히 사랑받는 일은 그렇게 쉽게 일어나지 않기에.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알지 못하는 순간에 누군와 도움을 주고 받는다. 때로 그 도움은 생명을 지키는 일일 수도 있고, 마지막까지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해도 의미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그들을 살렸고, 그들의 삶이 다시 우리를 살게 하니까.

 

 세상에 특별해 보이기 위해 너무 많은 걸 희생하고 있는 건 아닐까.

보이는 건 물론 중요하지만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라 믿는다. 때로는 보이지 않는 걸 보고, 발견하는 사람과 만나기도 하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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