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불평등 기원론_장 자크 루소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독서 모임이 몇 개 있다. 그 중 하나가 '일독수다'.
한 권의 책을 정해 읽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 다양한 관심을 갖고 있는 다방면의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함께 읽는 책도 다양하다. 이번에 함께 읽은 책은 장 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
과거 윤리 시간에 짧게 배웠던, 그래서 이름은 익숙하지만 실제로 읽어보니 역시 버거운.
그러나 뭔가 좀처럼 도전하기 어려웠던 책을 읽었다는 뿌듯함이 남았다.
태반은 알아 듣지 못했고, 핵심을 제대로 파악한 건지 의문이 남지만 1시간 남짓 나눈 이야기가 아주 뿌옇던 머릿 속에 작은 길을 만들어볼 기회를 선물했다. 혼자 읽고 생각을 남기는데 그쳤다면 얻지 못했을 기회다.
느닷없는 이야기지만 레고라는 장난감은 참 흥미롭다. 수만 개의 조각으로 상상도 못했던 걸 만들기도 하고, 역시 본래의 용도와는 전혀 다른 곳, 예를들면 도로의 패인 홈을 메운다거나, 구멍을 막는다거나 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어떤 조각이 더 쓸모 있고, 다른 조각은 덜 쓸모 없는 게 아니라 무엇을 상상하느냐에 따라 모두가 적재적소에서 활약할 수 있게 되는 거다. 그야말로 생명이 없으면서 생명을 지닌 듯 변화하는 장난감인 거다. 레고와 인연이 없어 친해지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일단 책 얘기를 좀 하자.
18세기, 프랑스가 강력한 전제군주 통치하에 있던 시기, 권력자와 특권층을 비판하며 개혁을 논했다는 이유로 루소는 '찍힌 인간'이었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강단이 있는 사람이라 권력 가지신 분들을 살살 구슬리고 띄워주는 척 하면서 거센 비판이 담긴 논문을 내놓는다. 그 중 대표적인 논문이 <인간 불평등 기원론>인 거다.
여기서 논하는 주제는 이거다.
인간들 사이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며, 불평등은 자연법에 의해 허용되는가._펭귄그레이트북스 33p
아카데미가 제시한 주제라고 한다. 이에 루소가 내놓은 건 이런 제목의 논문이다.
<인간들 사이 불평등의 기원과 근거들에 관한 논문>
책에 담긴 내용은 주제와 제목 그대로의 내용이다. 인간의 불평등의 기원을 추적하고, 자연법을 살펴본 후에 언제, 어떻게, 왜 불평등이 발생했으며, 그 불평등은 심화되고 있는지 혹은 완화되고 있는지. 심화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며 그 근거는 무엇인지.
그런 내용인 거다. 궁금하면 읽어보면 될 일.
일독수다 모임을 끝내고 집에 오는 길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독서 모임에 왜 참여하며 무엇을 얻고 있는지, 함께 이야기 나누는 사람들의 존재가 얼마나 의미있는지 실감하면서 집으로 향하던 때였다. 한 가지 생각, 정확히는 질문이었다.
계기는 사소했는데, 횡단보도 중앙에 서 있는 차를 발견한 거였다. 라라랜드 OST 중에 오프닝을 신나게 듣고 있었다. 자신이 끼치는 보행자들의 불편에는 아랑곳 하지 않는 무심하고도 당당한 모습. 마침 경찰 두 명이 순찰을 도는지 횡단 보도를 건너오고 있었다. '혹시 정지선 위반 단속을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지만, 경찰은 그냥 지나쳐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단속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듯이. 혹은, 단속할만한 사람, 상황이 아니라는 듯이.
그때 떠오른 질문이 바로 이거였다.
불평등은 아주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같은 상황에서 같은 룰이 다르게 적용되는 식의 일은 너무나 흔하게 벌어진다. 예외가 예외에서 끝이 난다면 불평등의 문제까지 불거지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런 예외가 계속되면 하나의 특권처럼 여기는 이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 특권이 단지 순간에 그치지 않고 지속될 때, 지속된 특권이 어떤 권력과 결합될 때 혹은 특권 자체가 권력이 될 때 불평등은 확실한 형태를 갖게 되는 것 아닐까.
아직 세상에 권력 관계가 생겨나기 이전 상태, 루소의 말대로라면 미개한 상태였을 때에는 권력이 큰 의미가 없었으리라. 한 곳에 정주하기 전이고 사유재산의 개념도 없었으며 공동체는 물론 가족이라는 집단의식도 발생하지 않았을 때는 말이다.
사람이 한 곳에 정착하게 되고, 개인으로 살기 보다 집단으로 사는 게 생존에 유리함을 깨닫고 협력하는 단계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으리라. 이때 이미 불평등한 관계나 지위가 발생했다고 해도 그 불평등이란 권력 관계라기보다 자연적인 능력의 차이 혹은 적성의 차이를 의미하지 않았을까.
문제는 그 다음에 생겼다. 누가 시작했는지,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알 수 없지만 이런 불평등한 상태를 이용해서 다른 인간을 지배하고 복종시키며 착취하는 방법을 선택한 거다. 힘의 차이 혹은 능력의 차이가 일한 결과물의 차이를 만들었을 건 명백하다. 하지만 그 차이가 필연적으로 착취와 피착취 혹은 지배와 피지배의 권력 관계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갈등하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쓰기보다 협력하는 편이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 낼 거라고 기대하는 게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갈등을 택했다. 생존에 유리하기에, 더 효율적이고 큰 이익이 되기에 만들었을 사회와 제도, 지위와 책임을 타인과 다른 세계를 지배하는 데 활용하기 시작했다. 왜 그랬을까?
아직 불평등이 부정적인 이미지를 얻기 이전 세계에, 불평등이 열등함이나 약함을 의미하기 이전의 상태에 왜 그들은 만족하지 못했을까? 인간의 본성이 악하고, 타인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을 품고 있기 때문일까? 성경에서 아벨을 질투해 죽인 카인처럼,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타락을 선택한 이브처럼, 인간은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였을까?
장난감 레고에 더 우월한 조각, 더 우수한 인간 인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언가를 만들어 낼 때 자기 자리와 쓰임을 발견할 수 있고, 어느 자리에서든 유용함을 발휘한다. 조각으로 무엇을 만드느냐에 따라 자동차가 되기도 하고 우주선이 되기도 하고 벽이나 도로의 구멍을 막는데 쓰이기도 하고 예술품이 되기도 한다. 어느 것이 더 가치 있고 덜 가치 있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다른 조각이 없이 하나의 조각뿐이라면 무엇도 완성할 수 없기에.
권력자들의 특권 의식이 사회 문제로 지적된 건 오래된 일이다. 권력을 책임으로 인식하지 않고 권리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권력, 뭘 하는 자리에 있는 누구를 안다는 식의 작은 권력조차 휘두르려는 사람이 있다. 지켜야 하는 룰을 지키지 않는 걸 자랑스럽게 여기고 만족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동일하지 않음, 불평등을 기회로 삼아 이득을 추구하면서 타인의 피해에는 눈을 돌리는 사람들이 있다.
현대 사회에서 불평등의 문제는 큰 권력을 가진 사람과 권력이 없는 사람 사이의 문제만은 아니다. 진짜 문제는 권력의 불평등이 만든 착취와 피착취의 구조가 상단에서 말단까지 동일하게 퍼져 있다는 거다.
루소가 지적한 것처럼 최초에 말뚝을 박고 소유를 주장한 이를 향해 어떤 현명한 이가 그 말뚝을 뽑아내며 '너에게는 소유를 주장할 권리가 없으며, 우리에게는 복종할 의무가 없다'고 말했다면 지금에 이르지 않았을지 모른다. 지금이라도 권력을 책임이나 의무가 배제된 순수한 권리로 생각하는 이들에게 모두가 한 목소리로 '너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고 못 박는다면 변화는 시작될 거다.
물론 꿈 같은 이야기다. 정말 인간이 평등한 걸 환영하고 반길까? 남들과 같은 수준에서 동일한 행복을 누리는 걸로 만족할까? 지키기로 약속한 규칙을 조심스럽게 배려하는 마음으로 지켜나갈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 100개의 레고 조각으로 작은 집을 짓는 데 만족하기보다 10000개의 레고 조각으로 성을 만들고 싶어하지는 않을까?
불평등을 문제 삼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기회를 잡게 되면 그 불평등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애쓰는 게 현실이 아닌가?
루소는 이렇게 말했다.
지배하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을 복종시키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_펭귄그레이트북스 111p
현실 세계에는 온통 지배하려고 애쓰는 사람들뿐이다. 아주 작은 권력이라도 갖기 위해, 한 사람이라도 지배하기 위해, 한 순간이라도 지배하기 위해 애쓴다. 불평등이 인간을 복종시키기에 얼마나 유리한 세상인가.
인간 불평등의 기원을 밝힌다고 해도 종언에 이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공산주의 혁명을 부르짖던 사회주의 국가의 실패를 역사는 지켜봤다. 인위적인 평등, 동일해지기를 추구할 게 아니라 불평등이 부정적인 의미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
언젠가 모든 인간이 서로 경쟁하고 다투며 해치기보다 도우며 함께 하는 게 더 낫다는 걸 깨닫는 날이 올까? 그랬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정말 좋겠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렇게 작은 소망을 혼자 적어보는 게 전부지만 변화의 때는 반드시 도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