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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Sep 03. 2018

[토지 읽기] 북큐레이터가 뽑은 최고의 장면 #1

토지 5권_2부 1권

얼마 전 읽은 <나, 참 쓸모 있는 인간>에 자극 받아(https://brunch.co.kr/@captaindrop/461)  4년 간 지지부진 했던 토지 읽기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1부 4권까지는 경남 하동 최참판 댁을 무대로 이야기를 풀었고, 2부1권 부터는 간도땅 용정으로 무대가 옮겨옵니다. 2부의 시점은 1911년 5월. 1부가 1987년 한가위를 배경으로 삼아 시작하니, 20년 넘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소설은 '이제 좀 본격적으로 시작해볼까?'하는 느낌입니다.

 1부에서는 하동 지역 대지주이자 양반 집안인 최참판 댁이 몰락하는 과정이 그려집니다. 불륜과 살인, 전염병에 일제의 침략. 불행과 불운이 이어져 급기야 최참판 댁 마지막 자손 서희는 남은 식솔 몇과 마을 사람들을 모아 고향을 버리고 떠납니다. 

 2부 1권은 고향을 떠나온 서희가 재산을 모으고 힘을 키워 최참판 댁을 되찾기 위한 결심을 보여주는 한 편, 고향을 잃은 이들의 어려움과 그들 사이의 갈등, 부역자와 독립 투사들의 활동, 애정 전선에서의 승자 없는 다툼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특별히 한 집안의 이야기라거나, 누군가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모양이 아니라 각각의 등장 인물들의 삶이 주연이 되는 이야기라 복잡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20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은 사람을 지레 겁먹게 하고 질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대하소설, 위대한 작품 등 평가와 찬사도 읽는 부담을 만듭니다. 뭔가 의미를 두고 읽어야 할 것만 같고, 감동을 받지 못하면 잘못 읽는 것만 같을 수 있으니까요. 


일일 드라마를 보는 거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합니다. 50부작 드라마를 한 번에 보려면, 단지 보기만 하면서 줄거리와 상황을 따라가기만 하는 거라 해도 막막하게 느낄 수 있지만, 한 편 한 편 보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회를 맞는 것처럼 한 장 한 장, 한 권 한 권을 주욱 읽어나가면 너무 길어서 부담스럽던 이야기도 끝에 닿아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토지 5권에서 뽑은 최고의 장면은 바로 여깁니다.


최참판 시절부터 서희 네 식솔로 용정까지 함께 온 이용이라는 사내가 있습니다. 이 남자는 우유부단해서 답답한 케릭터인데요, 더 이상 서희 네에 신세 지지 않고 자신의 몸에 익은 일을 하기 위해 용정을 떠나려는 결심을 합니다. 여기에는 복잡한 개인사(여자문제 + 자존감)가 얽혀 있는데 소설 속에서 확인해 보시고, 떠나기 전 서희와 독대하면서 이용은 얼마쯤 퉁명스럽게 굴게 됩니다. 가뜩이나 복잡한 심경이던 서희는 개인사(사업문제 + 평판 + 사랑 + 야망)에 더해 마치 자신을 탓하는 듯한 주변 사람의 태도에 얼마쯤 절망하여 억울함을 토로합니다. 잘 되면 자기 덕, 잘못 되면 남탓을 한다고 하는데, 마침 여러 사람, 상황이 서희를 몰아세우고 있던 차에 어려서부터 함께 한 이용마저 자신을 탓하듯 하자 분노하면서도 서글펐던 거죠. 


 "송충이는 솔잎을 묵어야지 갈잎을 묵으믄 죽십니다."
 퉁명스런 정도를 넘어서 노골적으로 비꼬며 서희 권위를 때려 부수려 드는 기색이다. 오만했던 서희 눈빛이 별안간 흐려진다. 어둠에 자맥질하듯 절망 같은 것, 외로움 같은 것이 솟구쳤다 가라앉곤 한다. 드디어 서희 눈에는 환하게 영롱한 본시의 빛이 켜진다.
 "내가 너희들한테 빚진 게 있느냐?"
 "아, 아닙니다. 그런 말씸을."
 비로소 당황한다.
 "왜들 이러는 게지? 모두들!"
 작은 주먹으로 마룻장을 내리친다. 날카로운 음성이 넓은 집 안에 울려 퍼진다.
 "너희들이 나로 인하여 이 만주벌판에까지 왔떠라 그 말이냐? 왜들 이러는 게지!"
용이 얼굴이 시뻘게진다.
 '아닙니다. 애기씨! 지, 지가, 지 자신이 노엽아서 그렇십니다. 누, 누굴 원망하는 기이 아닙니다.'
  "이제는 최참판댁 작인도 하인도 아니란 그 말이겠다? 세상이 달라지고 고장도 달라지고 오오라, 그 말이렸다? 그쯤은 나도 알고 있어! 모두 마음대로 하는 게야. 눅 발목을 묶어놨기에 제 갈 길을 못 가는 게냐. 마음대로 가면 될 거 아니겠느냐?" 
 용이는 입이 붙어버린 듯 말을 못한다.

 서희, 최참판 댁 자손이라는 자리에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책임을 짊어진 그는 <토지>를 읽지 않고 이 부분만 읽는다면 짐작하기 어렵겠지만 고작 열아홉 살에 불과합니다. 불과 몇 년 만에 어머니, 아버지에 이어 할머니까지 잃고 자라온 터전마저 빼앗겨 도망치듯 낯선 땅에 자리 잡아야 했던 기억과 가문을 책임져야 한다는 일념으로 비난과 멸시를 견디고 있는 상황 속에서 자기 편 하나 없는 외로운 처지라면 한이 맺힐만 하죠. 


 이 장면을 최고의 장면으로 뽑은 이유는 서희가 약한 모습, 지극히 인간다운 면모를 보이면서 이 다음 장면에서 이어지는데, 모질게 말하면서도 선을 넘지 않는 감정의 절제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생색 내거나 내색하지 않더라도 가장 가깝게 느끼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음에도 원망하기만 하는 사람들이 섭섭했던 기억, 남이라면 남이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오히려 가까운 사람에게 서운함을 느끼고, 그 서운함으로 화를 내고 다퉜던 기억을 돌아보게 했기 때문이고요. 


 솔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감정에든 사실에든 허심탄회하기 어렵고요. 스스로 솔직하지 못함이 부끄럽지 않고 거리낄 것 없는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없겠지만 스스로의 솔직하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사람들의 작은 언행, 태도가 큰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소설 속 서희는 어려서부터 모질고 건방진데다 표독스럽고 막무가내의 욕심쟁이 같은 면모를 여러 번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서희에게 속이 없는가? 슬픔이나 아픔이나 상처 없는 피 흘리지 않는 쇳덩어리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서희에게 애정까지 품을 수는 없지만, 또한 연민하지 않을 수 없음을 깨닫게 하는 한 순간. 

저는 이 장면에서 그 순간을 보았습니다. 

열어 놓고 약해질 수조차 없는 인간이란 얼마나 안쓰러운지요. 


지금까지 토지 5권 최고의 장면, 북큐레이터 서동민이었습니다.


2부 2권, 6권의 최고의 장면에서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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