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의 시간이 바꾼 질문 #2

부유함이나 가난함이 선하거나 악할 수 없으니까

by 가가책방

부유함과 가난함 사이에 선택이 존재한다면 굳이 물질적 가난을 택하려는 사람이 있을까?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속 백치 공작이라고 해도 굳이 가난을 택하지 않을 것만 같다. 부족이 꼭 비참함으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가난은 반드시 비참함을 만드니까 말이다.


가난함과 부유함을 주제로 삼은 질문은 시기마다 모습을 바꿔가며 오래 주위를 맴돌았다. 지금도, 이 순간에도 여전히 말이다. 하지만 책과의 시간을 통해 이번에도 질문에 주어가 바뀌는 일이 생겼음을 깨닫는다.

예전이라면 이렇게 질문을 했으리라.

질문 1. 왜 가난한 사람은 언제, 어디에나 있을까?

대답 1. 가난한 사람이 있어야 부유한 사람도 존재하니까.


지금은 이렇게 바꿔서 묻는다.

질문 2. 누가 가난한 사람인가?

대답 2. 그건, 그때그때 다르다.


가난한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인류 사회에 소유의 개념이 생겨났을 때, 혹은 소유를 비교할 수 있게 됐을 때, 더 많이 갖는 자가 더 높이 오르기 시작했을 때, 그 어느 때 이후로 늘, 언제나.

가장 부유한 나라에도 거지는 있기 마련이고, 가장 가난한 나라에도 부자가 있다. 가장 가난한 나라의 가장 부유한 사람이 가장 부유한 나라의 가장 부유한 사람보다 더 부유할 수도 있다. 절대적으로 비교를 하거나 상대적으로 비교를 해봐도 가난을 없앨 수는 없다.

옛날 옛날 말에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때로는 가장 가난한 자가 나라님일 수 있으니 어찌 구제할 엄두를 낼 수 있을까.


꼭 책이 아니었어도 질문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살아가다 보면, 뉴스에나 혹은 누군가가 찍은 영상이나 어느 채널의 프로그램에서 가난의 정의를 뒤흔드는 사례를 하나나 둘 혹은 그 이상 접했을 테니까.


굳이 책을 통해 변했다고 말하는 이유는 가장 극명하게, 무엇보다 높은 빈도로, 어떤 드라마보다 극적으로 대비시켜 볼 수 있는 자극이 되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보면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례들이 책에서는 오롯한 현실처럼 읽히기 마련이다. 현실은 너무 많은 정보가 넘치고 너무 많은 정보는 없는 정보나 다름없이 처리하는 게 보통이니까.


그래서, 누가 가난한 사람인가?


겉보기에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면 이런 사람들이다.

그리고 실제로 여유로운 상황에 있을 거라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같아 보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누군가는 필요 없어 버린 박스를 모으고 빈 병을 줍지만 그 일을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여유롭게 지낼 수 있는 사람들을 여럿 알고 있다.


정신 승리나 하며 만족할 생각은 없다. 그런 사람들이 있지만 여전히 가난이 현실이라 길로 나서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같은 일을 하는 다수가 가난한 형편에 처해 있을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다.

“삶은 그 자체로 존중받을 수 있어야 한다.”

달라진 질문이 갖는 의미는 이거라고 생각한다.


왜 가난한가, 가난은 누구의 잘못인가를 생각하며 분노하거나, 연민하거나, 냉소하기 전에 그 삶에 저마다의 이야기가 존재함을 생각하는 일.


이면을 들여다보는 데 서툴렀고, 내 직관이나 결론이 옳을 거라는 생각으로 감정적이 되거나 이성적으로 분석했던 시간은 그들의 이야기 앞에서 무의미해짐을 깨닫는다.


나는 가난한 사람인가?

대답은 미뤄두자.

다만 기억해두기로 하자.


다만, 기억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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