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만 글 이어 적기 1.
문득 오늘까지 적어온 모든 글이 다 이어적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편의와 여러 이유들로 시간을 나누어 생각하지만 결국 시간은 한 번도 끊기거나 나누어진 적 없듯이 그렇게 말이다. 시간이나 삶처럼 지금 쓰는 무언가도 일상 혹은 사건에서 상상하거나 떠오른 유난히 눈에 띄는 조각에 불과하다. 특별히보다는 우연히 떠오른 생각. 그래서 쓰다가 그만둔 글도 생긴다. 그때는 커 보였으나 무언가를 이유로 작아지거나 덜 중요해져서 잊어버린 조각들. 어떤 글쓰기 플랫폼들은 그런 글들을 저장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브런치에도 그런 기능이 있고 가끔 돌아보기도 하지만 이어 쓰는 일은 거의 없다. 잊어버리기도 했고,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마음에서다. 그러다 오늘 문득, 이유를 발견한 거다. 지금까지 적어온 모든 글이 다 이어 적는 과정에 있다면 5년이나 10년 전쯤 쓰다만 글을 오늘 이어 쓰는 일도 자연스럽고 처음 떠올린 단서를 잊거나 전혀 다른 성격의 글이 된대도 괜찮은 게 아닐까. 그때와 지금은 처지도, 상황도, 관심도, 생각조차 다르지만 이어 적기로 한다. 아래는 2020년 1월에 쓰다만 글이다.
책을 고르고 추천하는 일을 5년째 하고 있다. 자신을 위한 책을 찾고, 고르고, 평하기를 계속했던 그 이전 5년을 합치면 10년째 누군가에게 맞는 책을 고민하는 삶을 사는 셈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가장 대답하기 어렵고, 추천하기 부담스러운 질문 혹은 요청은 변하지 않았다.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책을 추천해 주세요."
자신을 포함해 거의 모든 현대인이 고민하는 게 아닐까 싶은 주제, 자존감.
자존감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많은 사람을 오래 앓게 하는 걸까.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자존감'을 검색했더니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국어대사전이 아닌 '우리말샘' 페이지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국어대사전에는 '자존'만이 실려 있고, 자존감은 우리말샘에야 전문가 감수 단어로 표시된다. 실려있는 예문도 2000년과 2007년 신문 기사 속 문장이다. 그리 깊은 역사를 갖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표현이 아닐 거라 추측하게 되는 부분이다.
우리말샘에 자존감은 명사로 '스스로 자기를 소중히 대하며 품위를 지키려는 감정'이라고 풀고 있다. 뜻풀이를 바탕으로 자존감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자존감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높이는 방법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우선 주어에 앞서 '스스로'에 주목하자. 스스로라는 건 타의 혹은 외부의 압력에서 자유로운 상태에서 내린 결론 혹은 선택을 의미한다.
주어는 '자기'다. 주목할 부분은 '자기 스스로'가 아닌 '스스로 자기를'이라 적은 순서다.
'자기'가 있고 '스스로' 즉 앞에서 '자유로운 상태에서 내린 결론 혹은 선택'이라고 말한 과정이 있는 게 아니라, 결론 혹은 선택이 있고 '자기'
5년 전의 나는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자기'와 '스스로'를 애써 구분 짓다가 쓰기를 그만둬버렸다. 왜 그랬을까. 알 수 없으므로 오늘의 내 마음대로 이어 적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자존감을 갖기 위해 '나', '자기'가 누구인지 먼저 알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하고 싶던 게 아닐까 싶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데 자존감이 어디서 생겨날 수 있는가 하고 지극히 합리적인 질문을 던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나를 몰라도 '스스로', 이미 저절로 자신을 소중히 하는 마음에 주목하자는 말을 하고 싶던 게 아닐까. 사회를 위해 거창한 기부 혹은 눈에 띄는 좋은 일을 할 수 없으므로 5,000원이나 10,000원 정도의 가치를 지닌 사소한 기부조차 하지 않는 일과 같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말을 알면서 자존감을 갖기 위해서 '내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갇혀 스스로 자존감이 없다고 매정하게 굴고 있는 건 아닌가. 나를 알아도 내 생각을 몰라도 자신을 소중히 대해야 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인데 말이다. 자신을 소중히 대하지 못하는 사람이 타인을 소중히 대할 수 있다고 믿는 건 이상하다. 나보다 더 소중한 타인이라니.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책은 없다. 아마 이 생각은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을 거다. 자기 안에서 스스로를 소중하게 대하며 자기에게나 타인에게 품위를 지키려는 감정을 발견하지 못하는데 책을 읽는다고 발견하게 될 리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자기 계발서들이 자존감을 높이겠다며 해결 방안을 제시한다. 이렇게 하면 됩니다. 이렇게 하세요. 저건 하지 마세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확신하는 말을 늘어놓는다. 어떤 사람들, 어떤 마음 상태에서는 그 말들이 자존감을 높여주는 듯한 효능을 갖지만 아마 많은 경우 더 실망하게 하고 '난 역시 안 되나 보다'하고 좌절을 부추긴다. 그런 책들이 자존감을 높여줄 리 없다.
그럼에도 책에서 자존감의 단서를 찾아야겠다면 이제 처음 한글을 배우고 스스로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아이들이나 읽을 법한 동화책들을 무심히 들춰보기를 권한다. 가까운 도서관이나 동네 책방에 들러보는 거다.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안 된다면 또 방법을 찾아야겠지만 사실 상황이 되는데도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책에서 자존감을 높일 단서를 찾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당신은 다만 '책 속에 길이 있다' 같은 허울 좋은, 있어 보이는 말로 주변에 보여주고 싶은 태도를 꾸미는 것뿐이다. 거기엔 스스로도 없고 자기도 없고 진심도 없다. 그런 사람에게 높은 자존감이 생겨날 리 없다. 괜히 어려운 책, 유행한다는 누가 이렇게 저렇게 공감하고 자존감이 높아졌다는 책들을 읽으려 시도하다가 난 역시 안 된다며 바닥을 뚫고 들어가게 될지도 모른다.
자존감을 책에서 구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미 당신은 충분히 소중하고, 스스로에게나 타인에 대해 품위를 지키는 건 당연한 거니까.
그러고 보면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어서 더 자주 길을 잃는 게 아닐까 싶다.
눈이 내리는 게 당연한 겨울에 늦봄이나 초여름만큼 비가 쏟아졌던 2020년 1월처럼.
그럼 이렇게 생각해 보자.
잘 모르겠는 감정, 너무 자주 길을 잃는 것만 같은 나, 모든 나쁜 일이 내가 못난 탓이라는 모진 마음.
혹은 나는 이래야만 한다거나 이렇지 않은 건 잘못된 것이라는 확신들.
그 모든 것 역시 당연하지 않다고. 오늘은 그렇게 느끼더라도 내일은 혹은 다음 순간에는 달라질 거라고 말이다.
기억을 되짚어 보길.
어떤 책에도 무언가가 영원하다거나 언제나 당연하다고 쓰여있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바뀌고 흔들리고 무너져 내린다고 썼을 것이다.
보이는 것을 보자. 보고 싶은 것만 생각하고 있으면 보이지 않는 게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