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들/ 워라밸이란 무엇인가

<노인과 바다> 속 노인을 중심으로

by 가가책방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은 제법 오래된 개념이다. 영미권에서는 1970년대에 나온 개념이라고 하는데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보다 오래전부터 흔히 언급됐을 법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일과 삶에서 균형을 맞추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워라밸이라는 개념이 어느 시점에 생겨난 게 아니라 어느 시점에 워라밸이라는 단어가 생겨난 거라고 봐야 한다. 단어가 사고를 규정하는 사건이 발생한 거다.

이후 그전까지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쉬면서 삶을 누리고자 했던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이 '워라밸'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표현되기 시작한다. 여기에는 효과도 있지만 부작용도 있다.

효과는 표현할 수 있게 됨으로써 요구할 수 있는 기회도 생긴다는 거다. 이전에는 원하는 '바'는 있지만 콕 짚어 이것이라고 '특정'할 수 없었기에 요구할 수 있는 기회도 없었다. 하지만 하나의 단어에 많은 사람들의 바람이 모일 수 있게 됨으로써 비로소 요구할 수 있게 된 거다.

부작용은 조금 더 복잡하다. 일단 사람들의 생각, 요구는 한결같을 수 없다. 미묘하거나 크게 다른 요구지만 달리 표현할 단어가 없기에 마치 동일한 것처럼 여겨지는 상황이 흔하게 생길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세상은 '당신의 요구에 응했다'고 말하지만 '나의 요구'가 전혀 응답받지 못하는 일이 생겨난다는 거다. 방법은 자신의 요구를 더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만들거나, 워라밸의 의미를 확장시키거나, '나의 요구'를 더 잘 표현해줄 누군가를 찾는 거다.


<노인과 바다>는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살아있을 때 발표된 마지막 소설이다. 줄거리는 84일 동안이나 물고기를 잡지 못한 운이 다했다고 평해지는 노인이 85일째 바다에 나가 그 어느 때보다 큰 물고기를 잡지만 상어 떼의 습격으로 뼈만 갖고 돌아온다는 거다.


이전에도 여러 번 읽었기에 줄거리나 전개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더 큰 물고기에 집착에 가깝게 몰두하는 노인의 모습에서 워라밸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건 우연이 아닌 재독 과정에서 생겨날 법한 필연이었던 거다. 결론부터 적으면 산티아고 노인은 워라밸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소설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데 노인은 과거 많은 영광을 누렸다. 어부로서도, 남자로서도 흠잡을 데 없는 시절을 보냈다. 열정적이고 활달하면서 경험 풍부한 어부로 살아왔다는 거다. 하지만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노인의 현재는 몹시 외롭고 쓸쓸한 데다 가난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유일한 위안이었던 아이, 어릴 때부터 뱃일과 낚시를 배우며 노인 곁을 지키던 소년 마놀린 마저 운이 다한 노인 곁에서 떨어져 다른 배에 타게 된다. 이제 노인의 '삶의 영역'에 남은 건 하나도 남지 않았다. 오직 과거의 모든 영광을 누릴 수 있게 했던 '일', 더 큰 물고기라는 '성과'만이 남은 거다. 워라밸에서 보면 노인에게 라이프란 물고기를 잡는 것, 그 어느 때보다 큰 물고기를 잡는다는 워크, 일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거다. 결국 외롭고 힘들지만 노인은 더 먼바다로, 홀로 떠 있을 수밖에 없는 망망대해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85일째 바다에 나가기 전에 꾸는 꿈, 배 위에서 던지는 혼잣말, 깊은 바닷속에서 헤엄치면서 배를 끌고 가는 거대한 물고기와의 대화 아닌 대화. 이 모든 장면들은 노인이 바라고 상상하는 삶의 모습과 일에만 몰두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현재의 모든 조건과 상황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해설에서는 바다를 인간을 겸손하게 만드는 거대한 존재라고 하고 심지어는 <노인과 바다>가 생태주의적인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고 해석하기도 하던데 그런 해설이나 해석은 어쩐지 삶과 동떨어져 있어서 공감하기 어렵다.


시간이 지나면 또 달라지겠지만 지금 떠오른 생각을 따라 바다를 해석하면 바다란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의미한다. 인생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자신의 인생을 살아내야 한다. 그건 마치 반드시 바다로 나가 물고기를 잡아야 하는 어부의 삶을 닮아 있다. 물고기, 바다에서 잡아야 하는 것은 인생 전체에서 '일의 영역'에 있다.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최소한의 일이 있고, 생계를 위해 꼭 잡아야 하는 어느 정도 이상의 물고기가 있는 거다. 하지만 바다에 혼자 나가는 사람은 별로 없다. 과거 노인에게 동료들이 있었고 얼마 전까지 소년이 함께 했던 것처럼 바다에는 동반자들도 존재한다. 그들은 인생 전체에서 보면 '삶의 영역'에 있다. 노인이 꿈꾸는 사자, 아프리카도 '삶의 영역'에 들어간다. 젊은 시절 본 사자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감으로써 노인의 삶에 들어왔다. 바다는 투쟁, 대결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 너머에 있는 휴식과 추억, 동료와 가족이 없이는 의미를 잃어버리는 공간인 셈이다.


84일이나 물고기를 잡지 못한 노인에게 바다는 오직 '일의 영역'만을 의미하게 된다. '삶의 영역'에 속하는 가족, 동료,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워할 공간 중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패배하고 돌아온 사람이 과거 승리의 연속이었던 시간을 추억하듯 그 자리에 없는 소년의 부재를 아쉬워하고,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시간을 자꾸 떠올리면서 형제와 다르지 않게 느끼는 깊은 바닷속 거대한 물고기를 '죽여야만 한다'고 믿도록 만드는 거다. 일을 통해서만, 남다를 성과, 누구보다 뛰어난 결과를 통해서만 과거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 노인은 점점 더 외로워질 수밖에 없다.

최후의 기대, 그 어느 때보다 뛰어난 성공의 증거인 거대한 물고기를 상어 떼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빼앗아 간다.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빼앗아 갔을 뿐 아니라 노인에게 어쩌면 치명적인 결과를 안길 상처까지 준다. 노인은 완벽하게, 완전하게 패배한다. 이제 노인이 할 수 있는 건 돌아갈 수 없는 과거,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꿈꾸며 긴 잠에 드는 것뿐이다.


여기까지가 지금, 2020년 1월 28일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인과 바다> 해석이다.

만약 노인이 워라밸을 알았다면, 일과 삶의 균형을 우선으로 했다면 노인은 84일이 되는 날까지 혼자 바다에 나가서 물고기를 잡지 못하고 돌아오는 불행한 상태에 빠져드는 일은 없었을 거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가정이라 확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노인에게서 떠나간 기력이나 힘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풍부하게 갖고 있는 경험과 기술을 전하는 일로 어부의 삶을 옮겨갔다면 하는 가정은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노인은 그러지 않았다기보다 그럴 수 없었던 듯하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노인의 삶은 자식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고, 아내마저 떠나버린 데다, 도제 격인 소년 마놀린은 너무 어려서 스스로 의사 결정을 하지 못하고 부모의 의지에 따라야 하는 상황이라 노인 곁을 지킬 수 없는 황량한 것이다. 자신이 이상한 노인이기에, 아직 기력이 충분하고, 기술이 있으며, 의지 또한 확고하기에 여전히 할 수 있다고 믿기가 더 쉬웠던 거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 태도를 보면 노인에게 특별히 적대적이거나 반감을 갖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보이지 않게 마음을 쓰며, 노인을 존중하는 태도까지 엿보인다. 결국 사람들은 기다리고 있던 게 아닐까. 노인 스스로 일과 삶의 균형을 찾아 자기들 안으로 들어오기를.


<노인과 바다>의 마지막 장면만으로는 완전히 비극인지 아니면 어느 정도의 안락한 마무리인지 확신하기 어렵다. 어쩌면 그날 이후로 조금은 따뜻하고,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워라밸은 일과 삶에서의 균형을 찾으려는 마음의 태도다. 그런데 요즘은 자꾸 이런 의문이 커져간다. 누군가는 일을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삶을 '휴식 혹은 여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 말이다. 절대적으로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일은 '하고 싶지 않다'거나 '해야만 하는'이라는 표현에 단정하듯이 가두기 어려운 영역이다. 좋아서 하는 일도 있는 법이고, 적당히 할 수 있다면, 최소한 지나치게 무리하지 않을 수 있다면 일은 긍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삶을 휴식이나 여가로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일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보면 휴식이나 여가라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워라밸에서의 삶, 라이프는 일과 충돌하는 개념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삶에는 휴식이나 여가도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들, 소중한 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워라밸에서 중요한 건 워크, 일도 아니고 라이프, 삶도 아닌 밸런스, 균형이라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다. 다르게 적으면 일이 없어도, 삶이 없어도 균형을 생각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일과 삶이 충돌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균형점을 찾아야만 한다는 것, 노인이 직접 바다에 나가 홀로 물고기와 맞서지 않아도 삶이 지속될 수 있음을, 그 가능성을 깨달아야만 했다는 것이 워라밸의 의미 아닐까.


이런 생각을 적는 건 종종 일과 삶이 마치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사람들과 만나기 때문이다. 워라밸이라는 태그를 따라가면 늘 만나게 되는 멋진 여행지와 퇴사 이야기가 함께 떠난 사람들보다 단지 떠났기에, 일을 그만뒀기에 행복하다고 말하는 듯한 느낌도 어딘가 개운하지 않다.


소설을 읽고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할지가 독자의 마음에 달린 것처럼 워라밸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고 추구해 나갈지 역시 각자의 결정에 달려 있다. 하지만 종종 떠올려 보면 어떨까, 나에게 워라밸이란 무엇인지, 정말 소중한 건 어디에 있는지, 너무 식상해서 생각하지 않게 되는 그 무엇들에 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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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워라밸이란, 볕아래 고양이를 보는 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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