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가책방 로컬 로망스
공주에 살면서 누릴 수 있게 된 즐거움 중에서도 커다란 즐거움은 로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만남이다.
특히 자신들의 공간을 만들고, 사람들과 소통하며, 독특한 일을 하는 매력적인 사람들을 알게 된 건 삶의 경계를 넓히는데 커다란 도움이 되고 있다.
공주에서 책방을 시작하면서 정말 많이 들었던 질문이 있다.
"왜 공주예요?"
마치 꼭 공주가 아니면 안 될 이유라도 있는 게 아닐까 궁금해하는 표정으로 말이다.
대답으로 제일 먼저 꺼내놓는 이유는 공주의 고즈넉함, 조용하고 쉴만함, 골목과 풍경이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이유는 사람에 있다.
그 사람과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있기에 끌렸고, 그 사람들을 통해 들여다본 로컬의 도시에 매력이 있던 거다.
대도시에서의 삶이 어디를 가든 사람과 자동차를 참아내야 하는 시간이었다면, 소도시의 삶은 적막함과 무료함을 이기는 현명함이 요구되는 시간으로 채워져 있다. 누구를 만나, 무엇을 하며 하루를 맞이하고 보내는가. 로컬 소도시의 삶의 질은 거기서 나뉜다.
로컬의 이웃은 로컬에 산다.
소도시는 사는 사람이 적은 만큼 관계의 밀도가 높아지기 쉽다. 하루에도 같은 사람을 몇 번이나 마주치고, 누구네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까지는 아니라도 그 집에, 누구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가 하는 소문은 빠르게 돈다. 정겹게 본다면 정겨울 수 있겠는데, 이게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쯤 되면 잠시 바람을 쐴 때가 된 셈이다.
"종종 시골에 살면 어디 여행할 필요가 없겠다."고 말하는 사람을 본다.
하지만 어디에 살건, 여행은 필요하다. 누구나 갑갑함을 느낄 때가 있고, 다른 풍경 속에서 다른 공기를 마시고 싶은 마음을 품고 살기에.
그래서, 떠났다.
공주에서 멀지 않은 도시.
홍성, 홍동면으로.
서울에 살 때는 여행을 편하게 대하지 못했다. 가까운 데, 어디를 다녀오려고 해도 계획을 세우고, 예약을 하고, 어디를 가면 좋을지 알아보고, 그러다 준비도 못하고 미리 지칠 때가 많아서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여행은 약간 부담스럽다. 하지만 이웃의 이야기를 들으러 가는 길은 다르다. 로컬의 이웃은 로컬에 산다. 서로를 서로의 공간에 초대하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에 익숙하다.
회색 도로보다, 인간이 세운 건물보다 초록과 자연이 흔한 곳. 도착해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수십 년은 됐을 커다란 목련이다. 유난히 동네 이 집 저 집에 커다란 목련이 피어 있는데, 또렷한 흰 빛이 무척 인상적이다.
어디를 가든 조심스러운 시기.
주인은 주인대로 일을 하고 우리는 우리끼리 마을 여기저기를 다녀본다.
잔뜩 물오른 냇가의 나무며, 색색깔 꽃을 피운 들풀들.
늘 푸른 대나무와 불어오고 불어 가는 봄바람.
비 소식을 알리는 예보와 회색 하늘마저 운치 있게 만드는 완벽한 오늘이다.
아스라이 먼 데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와, 간간이 지나는 자동차들.
한산한 소도시를 떠나 오히려 고요하기까지 한 곳으로 왔음에도 조금도 외롭지 않다.
그야말로 쉼, 휴식에 부합하는 시간과 공간의 완벽한 조화.
일이나 사람에 시달리기보다 마음에 시달리고 있었나 보다.
세상의 걱정과 염려와 조심스러움과 혼란에 흔들리는 마음 때문에 마음이 쉬지 못하고 있었나 보다.
밤은 고요했다.
소리뿐 아니라 빛마저 숨죽이고 자는 듯하다.
환하게 길을 밝히며 마치 적군을 경계하듯 하는 도시의 가로등과 달리, 이곳의 가로등은 등대처럼 길을 잃지 않을 만큼만 빛을 내면서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했다.
고향을 닮았다.
나의 고향.
나고 자란 그 마을도 이랬다.
밤은 밤답게 검었고, 낮은 낮답게 빛나는.
마음이 편한 데는 이유가 있구나.
시골의 밤은 길다.
그렇다고 일찍 잠들기엔 조용함이 아깝고.
침실 옷장에 작은 서재가 있다.
스무 권 남짓, 반려동물 관련도서부터 인문, 소설, 에세이. 다양하다.
거기서 만난 반가운 책 한 권.
도기더스테이는 원래 반려동물과 함께 여행하며 쉬고 싶은 반려인을 위한 반려견 동반 게스트하우스다. 가장 성업할 무렵에 혹독한 불황을 겪고 있는.
이웃이지만 반려동물과 함께 하고 있지 않기에 경험할 수 없던 공간의 숙박 경험을 갖게 된 건 분명 행운이지만, 지금이 아니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
그러나 반가운 책은 반가운 법.
미국의 유명 작가인 폴 오스터 소설로 죽음을 앞둔 동반자 윌리를 바라보는 미스터 본즈라는 개가 주인공이다.
동물을 의인화해서 마치 인간처럼 보이려 하지 않고, 하루하루가 전부인 듯 살아가는 개의 관점을 관철하는 부분이 좋다. 곳곳에 포진한 멋진 문장도 곱씹어볼 만하다.
예를 들자면 이런 문장.
선은 선을 낳고, 악은 악을 낳는 법. 비록 당신의 선한 행동의 결과가 악으로 돌아오더라도 계속 가진 것 이상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 이 말은 윌리의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 계속 살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_폴 오스터 <동행>/열린책들
시대착오적인 문장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록 현실적이지 않다고 해도, 꿈꾸며 추구해도 괜찮다. 세상은 선과 악의 구분을 어렵게 하고, 선한 마음이 배반당하는 일도 적지 않으며, 오히려 악하게 굴며 잘 사는 듯 보이는 사람도 많이 비춰준다. 하지만 그들의 삶이 그러하다 해서 나와 우리의 삶마저 그래야 하는 건 아니다.
쉴만한 곳에 와서, 반가운 책을 만나, 오래전 잃어버린 줄 알았던 희망의 흔적을 발견하는 일.
여행은 이토록 작지만 소중한 발견을 흔하게 이뤄낸다.
TV가 있지만 TV를 켜는 일도 없이 씻고 침대에 눕는다.
홍성의 이웃이 들려준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하나, 도기더스테이는 처음부터 반려동물을 동행한 여행자들을 위한 공간으로 설계, 시공해서 배수관이 일반 주택보다 두 배 굵은 걸 사용했다.(반려동물을 씻기면 털이 많이 빠져서 일반적인 배수관은 막힌다고)
둘, 도기더스테이를 다녀간 손님들이 후기에 이렇게 잘못 적곤 한다고 한다.
횡성에서 잘 쉬다 갑니다. -> 홍성이죠. 횡성은 강원도.
홍천이 충청도에 있어서 놀랐어요.-> 홍성입니다. 홍천은 강원도.
셋, 서울에서 충청도가 이렇게 가까운 줄 몰랐어요. -> 막히지 않으면 1시간 30분이면 도착.
불을 끄고 누었는데 때맞춰 빗소리가 커진다.
봄비는 들을 깨운다고, 우후죽순이라는 말처럼 하룻밤 하룻밤이 다르게 자란다던데.
홍성의 밤은 유난히 깊다.
아침은 밤과 다른 아침의 고요함으로 가득했다. 비둘기는 구~구~~구구 하는 소리로 리듬을 타서 노래하고, 어제보다 초록초록해진 잔디가 봄의 서두르는 마음을 눈으로 볼 수 있게 하는 풍경.
꿈도 없이 잠들었던 듯하다.
꿈에서 깨어 내다본 풍경이 오히려 꿈속처럼 흐릿한 곳.
70년 맛집이라는 국밥집을 소개해주셨지만, 때가 때인 만큼 발길을 집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에 지나친 풍경 속에도 곳곳에 꽃이 피었고, 봄은 점점 더 자라서 세상에 가득했다.
도시든 공간이든 이야기든 처음 접하게 만든 계기, 과정이 몹시 중요하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같은 책이라고 해도 누가 추천하고, 어떻게 권하느냐에 따라 다른 느낌으로 받아들여지고, 같은 곳을 여행하여도 누가 안내하고, 어떤 정보를 들려주는가로 이미지가 다르게 기억된다.
벌써 1년 넘게 알고 지낸 이웃이 안내하는 제대로 된 홍성을 만나러 다시 와야지.
그때는 지금처럼 숨죽이지 않고, 마음껏 숨 쉬며 느껴야지.
쉬러 간 여행에서 오히려 과제를 받아온 기분이다. 가가책방을 통해 공주를 접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무엇을 소개하면 좋을지. 그 여행이 더 만족스럽고 즐거울 수 있을지 앞으로 고민하며 풀어가야겠다.
친절하고 따뜻한 이웃들이 있으니, 그것도 막막하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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