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가책방 Sep 30. 2020

모두를 위한 도서정가제라는 거짓말

어렵게 풀어야 하는 문제를 쉽게 풀려하지 말자

투표를 한다고 가정하자.

찬반 투표다.


당신은 도서정가제에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


이런 투표는 그만두기로 하자.

애초에 찬성이나 반대로 나누어 다툴 문제가 아닌 것을 투표에 붙여본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도서 정가제는 완전 도서정가제로 나아가는 게 옳다. 다만 제대로 된 도서정가제여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2014년 얘기를 자주 하게 되는데, 당시 강화 도서정가제 시행 안을 접한 첫 느낌은 '누굴 위한 도서정가제라는 거지?'라는 의구심이다. 출판문화를 증진하고 작은 책방을 지키며 독자가 원하는 책 출간을 돕는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반대의 효과가 예상되는 내용만 가득했기 때문이다. 


 누가 정책을 내고, 누구와 논의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 시행을 결정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어쨌든 정책은 시행됐고 첫해부터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지금도 기억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2015년 온라인 서점은 역대급 매출을 낸다. 순익도 급상승한다. 당연하게도 할인해서 팔아야만 했던 책들을 할인된 공급가로 받아 더 적게 할인해서 팔아도 됐기 때문이다. 사은품이 규제되면서 서점은 경쟁적으로 사은품 출혈을 감수할 필요가 사라졌고, 일부 재정가 된 도서를 제외한 고전, 스테디셀러에서 상당한 이익을 냈다. 

 당시 독자로 살던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 정책은 잘못됐다. 나와 비슷하게 느끼고 공감하고 생각하는 독자가 대부분이므로 3년 후에는 어떤 모습으로든 정가제에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 그리고 3년이 흘렀다. 도서 정가제는 더 강화됐다. 나쁜 쪽으로.


 도서정가제의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먼저 얘기해야겠다. 아마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도 많을 텐데 도서정가제가 필요하다는 필요성과 도서정가제가 결국 독자에게 이득이 된다는 결과론은 거듭 얘기하면서 문제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적다. 그래서 내가 얘기하기로 한다.


 현행 도서정가제의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도서의 '정가'를 규제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판매가'만 규제한다는 거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전혀 다른 얘기다. 

 

 '정가'를 규제한다는 건 책을 만드는 쪽과 유통하는 쪽을 규제한다는 의미다. 출판사는 책에 '제값'을 매기고, 유통사도 '제값'에 유통하라는 의미라는 거다. 제값을 매겨 제값에 유통한 책이라면 책방, 서점들은 당연히 제값에 팔 수밖에 없게 된다. 이 과정이 이상적으로 진행된다면 독자는 한 점 의심할 이유 없이 보고 싶은 책을 정가에 사면된다. 왜냐하면 제값을 치르는 거니까. 


 '판매가'를 규제하게 되면서 문제가 생긴다. 출판사가 어떤 이유들로 책값을 조금 더 비싸게 정할 수밖에 없어졌다고 하자. 시작부터 이 책은 이미 '제값'이 아닌 상태로 시작한다. 유통사도 출판사에 '제값'을 치르지 않고 책을 가져오게 되는 건 당연하다. 물론 이 순서는 뒤바뀔 수 있다. 유통사가 출판사에 '제값'을 치르지 않음으로써 출판사가 '제값'보다 비싸게 정가를 책정할 수도 있겠다는 추측이다. 출판사나 유통사는 책을 팔아서 이윤을 낸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의 합리적 판매자라면 어떻게 행동할까? 당연히 더 많이 팔 수 있는 이들에게 더 저렴하게 책을 공급함으로써 이윤을 극대화하려고 하게 된다. 


 더 싸게 책을 공급받은 판매자에게는 할인이나 서비스의 여력이 그만큼 커진다. 그 여력으로 포인트를 지급하고, 무료배송도 제공한다. 물론, 10% 할인은 거의 기본이다. 이것이 정가가 아닌 판매가를 규제하는 현행 도서정가제의 최대 문제점이다.

  



 현행 도서정가제가 도서의 '정가'가 아닌 '판매가'를 규제하는 거라는 걸 간파한 일부 눈치 빠른 사람들은 '중고도서'에 주목한다. 사실 중고도서는 출판사나 작가에게 아픈 아홉 번째 손가락이다. 아무리 많은 중고 도서가 판매되어도 출판사나 작가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고 도서로라도 더 많이 읽히게 되면 출판사의 인기나 작가의 인지도가 올라갈 수도 있다. 그래서 아픈 아홉 번째 손가락인 거다.

 

 현재 많은 온라인 서점들이 중고 서점을 운영한다. 오프라인을 병행하는 곳도 있고, 온라인만 운영하는 곳도 있다. 과거 헌책방, 중고서점과 다른 점은 이들이 검색 기능과 무료배송을 제공한다는 거다. 그리고 고객 간의 거래에서는 수수료를 받는다. 어떻게든 팔기만 하면 이득인 시스템인 거다. 중고도서는 판매가를 규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중고 도서의 판매가는 처음보다 올랐다. 경쟁자가 늘었음에도 왜 판매가가 오르는 걸까. 당연히 정가가 더 올라갔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할인에 민감하다. 단 5%, 1,000원도 안 되는 가격 때문에 중고도서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그게 현실이다.

 



 도서정가제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있다. 그들은 왜 폐지를 주장하고 있을까. 단순히 적으면 예전보다 더 비싸게 책을 사고 있는 지금이 부조리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단순한 불만이 아니라는 게 중요하다. 책을 비싸게 사서도 있지만 '제값'에 사고 있는 건지 의구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왜 30%씩 할인하던 책이 정가로 돌아가서 매년 가격이 오르는 건지 납득하지 못하는 거다. 더 쉽게 말하면 독자만 호구 잡히는 제도처럼 느끼기에 폐지라는 극단적 조치를 요구하고 있다는 얘기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그 이유는 '정가'가 아닌 '판매가'를 규제하는 현행 도서정가제가 실제로 독자만 호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책의 가치를 알고 지키려고 하는 교양 있는 문화인들이기에 희생을 강요당하는 모양새가 싫은 거다. 


 현행 도서정가제는 결코 모두를 위한 도서정가제일 수 없다. 도저히 모를 수 없을 만큼 명백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정가'가 아닌 '판매가'를 규제하는 구조 때문에 독자인 소비자들은 더 비싸게 책을 사는 것 같은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정가제가 사라지면 출판사가 할인을 고려해 정가를 더 높게 책정할 수밖에 없고'라는 식의 변명이 정가제 폐지 반대 주장에 등장하는 순간 의구심이 확신이 된다. 

 "아, 그동안 그렇게 해왔다는 거구만." 

이런 자폭이 어디 있나.


 행정은 늘 과욕을 부린다. 그 과욕이 낳은 법도 한계를 무시하려고 한다. 

도서정가제 강화 시행을 앞두고 정부가 내놓은 이유들은 사실 하나로 묶을 수 없어 보이는 것들이었다.

판매가를 규제하는 정책을 동네책방을 살리겠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렸고, 더 많이 팔리는 책을 만들기 위해 시대 흐름을 읽고 사람들의 심리를 파악해야 할 출판사들에게는 '양서'를 출간하라는 사명을 부여했다. 구간 위주의 서점가의 흐름이 바꿔야만 하는 썩은 물이 됐고 도서정가제 시행 효과로 내세우는 자료에 신간 발행 부수 증가가 꼭 등장했다. 이상하지 않은가? 도대체 신간이 많이 출간되는 게 무조건 좋다는 판단을 어떻게 하고 있는 걸까. 

 '신간 발행 증가 = 좋은 현상'이라는 판단의 근거는 신간을 발행하는 중소규모, 신생 출판사가 더 많아졌다는 의미에서라고 한다. 그럼 신생 출판사가 더 많아져서 좋은 건 뭘까. 더 다양한 콘텐츠? 그건 누가 원하는 거고, 누구에게 돌아가는 혜택인 걸까. 쉽게 납득할 수 있는 논리가 아니거나 논리가 없는 주장이다.

 온라인 서점 어디에나 가서 '리커버' 혹은 '특별판'이라고 검색해보자. 구간이 신간이 되어 새롭게 출간된 후 새롭게 판매 상위에 오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신간 발행 증가 = 좋은 현상', 그건 아니다.


작은 책방, 동네서점을 돕고 싶었다면 더 활성화하고자 했다면 그 환경에 맞는 정책을 새롭게 만들었어야 한다. 판매력이 크지 않지만 출간되어야 하는 양서를 찾고 출간을 지원하거나 구매를 돕는 정책을 만들었어야 한다. 도서정가제 하나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자세 자체가 지나친 욕심이라는 거다. 


 모두를 위한 도서정가제라는 거짓말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충동적으로 떠오르는 걸 적어본 게 이 정도다. 

출판이 문화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는지 크게 공감한다. 책에서 발견하고, 책을 통해 만난 사람들 덕분에 거의 새로운 삶을 살다시피 하게 된 한 사람으로서 꼭 지켜내고 싶은 게 책이다. 하지만 그 책이란 건 물리적인 무엇에 국한되지 않는다. 


 출판 생태계를 지키는 일이 궁극적으로는 독자와 미래를 위한 것이라는 주장에도 동의하고 공감한다. 하지만 독자가 희생하는 것처럼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 출판사나 유통사나 큰 서점들은 당장에도 큰 이익을 얻고 있는데 먼 미래에 혹시나 누릴 수 있을 어떤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출판문화의 효과에 비용을 치르는 독자를 위한 도서정가제인가 말이다. 





 출판사나 유통사도 할 말이 많겠지만 지금의 도서정가제는 결코 모두를 위한 도서정가제가 아니다. 모두를 위한 해결책이라니 얼마나 오만한 말인가. 

 출판사가 생존하고, 유통사가 어려움을 겪지 않으며, 작은 책방도 웃을 수 있고, 독자가 믿고 살 수 있는 출판문화가 꽃피기를.  


 어려운 문제고, 어렵게 풀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누구든 쉽게 보고 쉽게 풀려고 하지 말았으면 한다.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는 묘책 같은 건 없다. 제발, 멀리, 두루, 때로는 나누어 보는 지혜를 발휘해주길 바란다.



별 의미 없지만 다시 찬반 투표를 해보자.


 당신은 현재의 '판매가'를 규제하는 도서정가제에 찬성합니까, 반대합니까.

앞의 글을 읽고 투표해 보세요.

다양한 의견, 경청하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책은 마음의 양식, 먹다 보면 자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