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만큼 보이는 줄 알았더니, 몰라야 볼 수 있는 게 더 많은 세상
영화 <내부자들>이 200만을 돌파했다고 한다. 그 200만 가운데 하나가 나다.
영화는 조폭과 검찰 언론과 기업의 유착과 비리를 폭로하고 응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권선징악.
유치하지만 이상적인 결말이다. 영웅들의 활약을 그린 이야기들은 대부분 영웅들이 악당에게 승리를 거두는 것으로 끝난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영웅의 활약을 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영웅이란 무엇인가?
영웅이란 쉽게 말하면 자신의 정의를 관철시킨 존재다. 그에게는 뛰어난 능력이 있거나 절대적인 힘이 있거나 뛰어난 능력이나 절대적인 힘을 가진 동료가 있기 마련이다. 흔히 영웅은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영웅을 만드는 것이 시대인지, 대중인지, 특정한 세력인지는 그때마다 다르기에 일반화시키기는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웅으로 태어나 영웅으로 죽는 영웅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영웅은 누군가에 의해 완성되어야만 하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이야기다.
이 영화에는 네 세력이 등장한다.
1. 정치세력
2. 기업세력
3. 조직폭력세력
4. 언론세력
이 가운데 영화가 지목하는 가장 커다란 위력을 가진 세력은 언론이다. 적어도 이 영화 속에서는 언론이 정치세력의 흥망을 좌지우지하고, 기업을 살리고 죽이며, 조직폭력세력을 미화하거나 고발하는 '위력 행사'를 통해 나라를 움직인다.
언론을 대표하는 인물로 나오는 백윤식의 대사 가운데 '보인다'와 '볼 수 없다'와 '보기 어렵다'에 관한 부분이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단순히 그의 이야기에 공감이 갔기 때문은 아니다. 그의 대사는 공감보다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흔히 사람들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아는 만큼'이라는 단어는 얼마나 알고 있을 때 적용할 수 있는 것일까?
또 달리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는 말도 한다. 그럼 '보고 싶은 것'은 정말 이 '사람들'이 보고 싶은 것을 말하는 것일까?
백윤식이 배역을 맡은 조국 일보 이강희 주간이 한 말의 요지는 이렇게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조직폭력배의 말을 '상식적으로' 누가 진실이라고 생각하겠는가, 명망 있는 정치인의 말을 '의심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앙심을 품은 조직폭력배는 복수심으로 인해 충분히 '고의로' 거짓말을 함으로써 상대방을 곤란하게 만들려는 시도를 할 수 있다."
재력, 권력을 가진 자는 '권위'와 '신뢰'를 두른다. 이들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위해 거의 최선을 다한다. 그렇기에 진실을 밝히려는 이들이 간절하고 절실해질수록 '시각을 비틀어버리기가 용이'해진다.
예를 드는 바람에 더 복잡해진 것 같으니 결론부터 이야기해야겠다.
"아는 만큼 보인다"와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는 둘 다 그렇다고 볼 수 있는 전제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면 어떨까?
"누군가가 당신들로 하여금 당신들이 '안다'고 착각하게 만들었다면?"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만 보고 있는 것이라면?"
무엇을 보여주는지는 아무 의미가 없다. 때로는 자신들에게 '불리'한 것까지 간단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안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보여진다'거나 '볼 수 없다'는 말보다 더 무서운 말은 '상식적으로'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상식'은 누구를 기준으로 한 상식인가? '상식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을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꺼려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상식'이란 흔히 '평균' 혹은 '표준'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보통 수준'의 사람이라면 꼭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상식이다. 상식이 없다는 말은 보통 수준 이하라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결국 이 시대를 살아가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목표로 삼고 있는 '성공'에서 그만큼 멀어진다는 이야기다.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이 반드시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성공이란 저마다 다른 수준, 다른 방향, 다른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 당연함에도 '누군가'는 성공을 표준화시키고 기준을 만들어 사람들의 두려움을 자극한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으로 시작되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런 거 모르는데?"라고 선뜻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한 가지 이유는 앞서 말한 '상식 없는 사람'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거기에 하나를 더 보내면 '말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직접적인 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굳이 상대방을 거스를 필요가 없기 때문이며, 가만히 있으면 2등이라도 간다는 말이 거의 언제나 진리처럼 증명되는 환경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된다는 것을.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된다는 것은 알아채지 못한다. 가만히 있는다고 좋아지는 것은 없지만 나빠지는 것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은 모른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순간에 '아는 것'이 죄가 된다. 모르고 있으면서 '안다'고 착각하는 것이 죄가 된다. 안다는 착각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성과 '상식'으로 판단하고 있으며 '진실을 본다'고 믿어버린다. 그렇기에 '상식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보이는 것으로 믿게 되고, '상식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보기 어려운 것으로 믿어버리는 것이다. 그야말로 '상식'이 '비상식'이 되고, '비상식'이 '상식'이 되는 역전의 연속인 셈이다.
이러쿵저러쿵 여러 가지를 말했지만 이 영화 속에는 '정의'도 '영웅'도 없다. 모두가 자신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을 보라며 보는 사람의 시야를 좁히는데 급급해 있었다.
정의라는 것은 정의하기 나름이다.
혼란의 시기에 영웅의 정의가 공동의 정의가 되기도 하는 까닭은 그것이 '최선처럼 보이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때의 정의롭지 못한 행위들조차 후대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것이 최선이었던' 것으로 바꿔 적어버리면 그것이 정의가 된다. 물론 그 이후의 누군가가 다시 그 정의를 바꿔 적을 수도 있다.
정의란 그렇게 말랑한 것이다. 찰흙의 반죽처럼 밥그릇을 빚고 싶으면 밥그릇이 되고, 요강을 빚고 싶으면 요강이 되며, 동상을 빚고 싶으면 동상이 되는 것이다.
정의가 정의로울 것이라고 믿는 것 혹은 정의는 정의롭다고 아는 것은 오늘 혹은 지금의 나, 혹은 우리의 믿음이자 앎에 불과하다. 세상에서 가장 현명하다고 하는 소크라테스조차 자신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 외에는 알지 못한다고 고백했었다. 이 시대에 소크라테스보다 자신이 더 현명하다며 자신 있게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그의 앎이란 결국 '자기'와 '지금'이라는 한계 안에서의 앎이다. 차라리 모르는 것만 못한 경우가 얼마든지 생겨나는 이유다.
지금도 어느 분들은 자신들의 앎 혹은 생각 또는 정의가 절대적인 것이라고 믿고 또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10년은커녕 5년도 못 갈 지금의 정의에 자신의 이름이니 생명까지 거는 것이 말이다.
이 영화의 교훈은 이런 거였다.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똑바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자신이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것을 '똑바로' '잘' 보기 위해 '생각해라'. 한마디로 다 잘해라.
이 글의 결론은 이렇다.
결국은 다 잘하라는 소리다. 그러나 다 잘하려고 애쓰려고 하면 인생이 너무 피곤해진다. 그저 재밌는 영화 한 편을 봤구나 하고 생각하며 극장을 나서기만 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다.
지금도, 자신이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이 있다고 믿고 있는가?
뭐, 그럼 그렇게 믿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