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은 말보다 고운 말을 찾아서
아이는 아빠와 더 오랜 시간을 보내는 걸 어떻게 생각할까.
아직은 엄마보다 아빠와 얼마큼 더 오래 함께 있다는 양적인 차이를 의식하고 실감하는 단계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애착의 정도나 깊이를 보면 무의식과 감각으로는 그 차이를 확실히 인식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아빠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긴 만큼 말투나 태도도 닮는다. 가끔 뉘앙스까지 닮아있는 걸 보면 깜짝 놀라게 된다. 동시에 하나의 염려도 움튼다. 나의 말하는 태도, 방식, 어휘가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까, 나쁜 습관이 생기는 건 아닐까 하는 염려다.
나는 고운 말보다는 옳은 말을 하며 살았다. 여기서 옳은 말이란 어법과 어문규정에 맞는 구조와 형식상에 맞는 말을 뜻하는 게 아니라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해 하는 말'이다.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 행동을 되짚고 그 잘못을 인식시키기 위한 말을 더 많이 해왔다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내가 항상 옳았는가 되물을 때면 "그렇지 못하다"는 답이 나왔으므로, 스스로를 속이지 못하고 늘 부끄러워해야 했다. 사람들과 세상, 무엇보다 나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옳은 사람으로 살고자 했지만 그 옳음은 늘 그늘져 있었다. 그 결과라고 말할 것도 없이 나는 늘 그늘져 있는 사람으로 살았던 거다. 그랬던 사람이 아빠가 되어 아이와 시간을 보낸다고 상상해 보자. 갑자기 사람이 달라질 수 있을까? 부끄럽다고 느끼는 일들, 행동들이 덜 부끄러워졌을까? 어쩔 수 없다고 타협할 수 있게 되고 뻔뻔해질 수 있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았다. 혼자였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과 함께라서 할 수밖에 없는 일과 그 일들이 가져온 책임은 매일 늘어만가고 커져만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그런 감정들이 육아 스트레스다. 그 스트레스가 가져온 가장 큰 공감은 독박육아를 하는 엄마의 감정이었다.
아이를 돌본다는 것, 먹이고 재우고 씻기고 입히고 가르치는 모든 과정이 포함된 중대한 과업의 태반을 홀로 감당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진다면 아이를 돌보는 책임을 맡은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자신을 '나쁜 사람'이라고 느끼게 된다. 나는 더 좋은 아빠일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부족한 사람이라고 느낀 날들이 그 근거다. 덜 좋은 아빠, 부족한 아빠, 때로는 나쁜 아빠라고 느낀 순간도 많고 이유도 다르지만 요즘 가장 마음이 쓰이는 게 말이다. 이제는 제법 유창해져서 간단히 아빠와 엄마의 말을 따라 할 수 있게 된 아이를 보며 어휘나 뉘앙스를 넘어 말 자체에 대해 고민하게 된 거다.
앞서 적었던 것처럼 나는 옳은 말을 하려고 해 왔다. 그런데 대개 옳은 말이란 상대방에게는 듣기 싫은 말이기 쉬우므로 단도직입적이거나 공격적으로 들리기 마련이다. 실제로 그런 의도를 담아 말한 적도 많다. 나중에는 그 말의 의도가 무엇이든 습관이 되어버린 옳은 말투가 잘못이 되어버린 거다. 아무리 공격할 의도가 없다,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고 변호해도 그렇게 들리는 이상 변명의 여지는 어디에도 없었고 내 말을 바꾸지 않는 한 이해와 설득은 가까워지지 않았다. 그런 아빠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처음에 적은 '아이가 아빠와 더 오랜 시간을 보내는 걸 어떻게 생각할까'하는 질문은 그런 아빠의 말을 어떻게 듣고 있을까로 바꿔 적을 수 있다.
"아이에게 내 말은 어떻게 들릴까."
지난 달일까, 그 전달일까.
엄마에게 얘기하는 아빠에게 아이는 울먹이며 이렇게 말했다.
"그만해, 싸우지 마."
그 말이 내겐 몹시 슬프게 들렸다. 지금도 그 순간이 떠올라 눈물 날 것 같은 기분이다. 그때 아이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마음으로 아빠의 말을 막았을까. 아이의 말을 듣고도 할 말을 이어가는 아빠를 어떤 눈으로 바라봤을까.
나는 그때의 말을 대화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언성이 높았는지 말의 뉘앙스가 날카로웠는지 둘 다였는지 아니면 날 선 감정까지 담겼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전부였을 것이다. 특정한 어휘로 정립되지는 않았지만 아이는 그 상황, 말들을 다툼이라고 판단했고 그 상황의 지속과 악화를 멈추기 위해 최선을 다해 소리를 냈을 것이다. 옳은 말이거나 맞는 말이거나 사실인 말이라고 해도 오가는 그 말들이 자신을 상처 입힌다고, 슬프게 하고 아프게 한다고 소리쳤던 거다.
그때부터 조금 더 진지하게 내 말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이와 함께 하는 아빠의 말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기 시작한 거다. 사실 그전에도 비슷한 지적들이 있었다. 직설적이다, 공격적으로 들린다, 옳은 말이라도 그렇게 말하면 듣기 싫은 법이다. 다 맞는 말들이다. 예전에 그 조언들을 듣고 바꿀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렀다. 거의 두 달이 지난 오늘까지 여러 핑계로 실천보다 마음 한 구석의 생각으로만 품고 다녔다.
금요일이기 때문일까, 오늘은 조금 마음이 너그럽고 더 여유로웠다. 그래서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를 생각하며 나아갈 방향은 어디로 할까 하는 생각을 시작할 수 있었다. 아이가 함께 있거나 아니거나 앞으로의 말은 옳은 말보다 아이가 들어도 이해할 수 있는 말로 하려고 한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나만의 생각, 기준에 있지 않아서 특별히 설명하지 않아도 다툼 없이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는 말. 누군가는 일상적으로 하고 있을 그 말의 방법과 태도를 배우고 익혀나가려고 한다. 수십 년이나 의식하지 않고 해 왔던 말을 며칠이나 몇 달 만에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믿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가 아빠라서 아이에게 나쁜 말의 방식과 태도가 움트기를 바라지 않는다.
아이에게는 오늘이 가장 말이 서툰 날이기에 오늘이 아빠의 말공부를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날인 것이다. 같은 말이라도 부드럽고 상냥하게, 설득당하고 싶고 저절로 이해되는 그런 말을 할 수 있게 되기를 꿈꾼다.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안다. 사람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이해 못 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은 예외이기를 꿈꾼다. 예외이기를 꿈꾸고 예외가 되기 위해 애쓴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인간은 애쓰는 동안 방황하기 마련이다'라며 파우스트 박사의 구원을 정당화한다. 나는 여전히 그 정당화를 납득하지 못하지만 인간이 애쓰는 동안 방황한다는 얘기에는 공감한다. 거듭하고 반복하지 않으며 잘못을 고치고 바로잡기 위해 애쓰며 방황하는 인간은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도 좋지 않을까.
첫 시간으로 고운 말을 찾아 떠나는 여정의 시작을 흔적으로 남긴다. 옳은 말만 찾던 사람이 고운 말을 찾아가려면 무엇을 알고, 무엇을 찾고, 어떤 걸 해야 할까. 숙제가 참 많겠다 싶지만 기초를 다지는 일부터 천천히 시작해야겠다.
고운 말을 찾아서,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