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듯 천천히

느려도 좋은 따뜻한 당신의 등

by 가가책방

10살 이전의 기억이 거의 없다. 남아있다고 해도 대부분 사진이 있거나 누군가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라고 전해 들은 기억이다. 내 것임이 분명하지만 확신하기 어려운 어린 날의 시간과 기억들. 그 시간과 기억에 별 아쉬움을 느끼는 일 없이 살아온 시간이 수십 년을 살았다. 이제는 충분히 둔감해져서 새삼 아쉬워할 날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문득 처음 기억 중 하나를 떠올릴 수 없음이 몹시도 아쉽다.


"엄마의 등에 처음 업혔을 때 기분은 어땠을까?"


세상에 태어나 이동하기 위해 처음 타본 건 엄마의 등이다. 전혀 기억에 없지만 틀림없을 거라 단정할 수 있다. 혼자 걷기 전까지 가깝거나 먼 나들이에 늘 업혀 다녔을 것이다. 혼자 걸을 수 있게 된 후에도 한참은 엄마의 등에 업혀 처음 보고, 처음 만나고, 처음 하는 일을 경험했을 것이다. 비교 불가능한 안정감과 온기를 지닌 엄마의 등이야말로 이 세상 최고의 일등석이었다.

그 자리와 멀어지기 시작한 건 혼자 걷고, 달리고, 여기저기를 다닐 수 있게 되면서였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더 빠른 탈 것이 자꾸 나타나고, 세계로 미래로 같은 표어에 힘입어 더 멀리, 더 많이 가보는 것을 꿈에 포함시켰다. 내가 업히기 싫어했는지 엄마가 업을 수 없게 됐는지, 누가 먼저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느 날부터 엄마의 등은 더 이상 타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젊은 엄마는 점점 나이가 들어서 언제부턴가 한참을 앞서갔다가 뒤쳐진 엄마를 기다렸다. 시간이 흘러 몇 년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엄마의 등을 봤는데 업혀 다니며 잠들기에도 넉넉했던 그 등은 작아지고 나이 들어 있었다. 그 얼마 후부터 엄마라고 부르는 대신 어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곤 어머니의 등을 완전히 잊고 지냈다.


처음 업힌 기분은 잊었지만 처음 업어본 기억은 남아있다. 여름에 태어난 아이는 잠투정이 심한 건 아니지만 새벽에 깨서 한참씩 안아줘야 울음을 그칠 때가 있었다. 아이가 잠드는 것보다 우리가 지치는 게 늘 먼저였는데 안는 것보다 업는 게 편하지 않을까 싶어 시도한 것이다. 부부가 아이 하나를 업겠다고 한참 끙끙거렸는데 결과적으로 아이는 내게 업히는 걸 싫어했다. 안아주는 건 좋지만 업는 건 거부했다. 나는 나대로 등에 아이를 제대로 업었는지 다리나 팔에 불편함은 없는지 숨은 잘 쉬어지는지 걱정돼서 안절부절못했다. 작은 아이를 업은 등은 너무 불편했고 작은 아이는 아빠의 등을 불편해했다. 걱정과 불편, 우리는 당분간 업거나 업히지 않기로 무언의 합의를 보았다. 편안함과 불편, 가능함과 불가능 사이에서 유예를 선택한 거다. 불안하면 잠시 그만둬도 좋다는 제3의 선택.

너를 처음 안았을 때

누군가의 등에 업힌다는 건 그 사람과 온전히 하나가 되어 움직인다는 의미가 된다. 동일한 속도로 움직이며 한쪽의 호흡을 다른 쪽에서 소리와 등의 움직임으로 느낀다. 업은 사람의 호흡인지 업힌 사람의 호흡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업힌 사람이 업은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거나 의지에 반해 움직이면 업은 사람은 더 빨리 지치고 업힌 사람은 자꾸 불편해진다. 온전히 업힌다는 건 상대를 완전히 신뢰하며 우리가 하나라는 확신으로 관계 맺는다는 의미다. 걸음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느린 이동 속도가 관계를 단단히 하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최고의 비법이었던 셈이다.


엄마의 등과 자동차, 비행기 같은 더 빠른 이동 수단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문득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이야기가 떠올랐다. 느리지만 꾸준히 걸었던 거북이의 성실함이 빠른 발을 믿고 방심하여 패배를 자초한 토끼의 오만을 이긴 이야기. 어린 날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모르고 자란 사람보다 보고 들은 사람이 더 많을 텐데 세상은 더 빠른 수단, 더 나은 방법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장려해 왔다. 현재의 최선을 계속하는 걸 도태라고 말하고 새로운 것을 끝없이 받아들이라며 선택지로 내놓았다. 빠르게 달리다 지쳐 쉬어갈 수도 있을 텐데 그 시간조차 아깝다며 쉬며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제시했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 엄마의 등과 나의 가슴을 갈라놓았던 그 가치가 세상을 따뜻하게 대할 수 없게 했던 건 아닐까. 다투고 경쟁해서 살아남아야 하는 야생처럼 경계하고 날카로워지게 만든 건 아닐까.


이제는 더 더뎌지고 느려진 어머니의 발걸음을 보고 마음이 무너진 듯하던 날이 있다. 떠오르지 않는 처음 업히던 날의 감각과 기억나지 않는 엄마의 등과 이별한 날의 마음과 꼿꼿함을 잃어버린 굽은 등의 감각. 두려울 때, 피하고 싶을 때, 도망칠 때 발걸음은 빨라졌다. 주변보다는 멀어져야 한다거나 다가가야 한다는 목적에 눈이 멀었다. 숨이 차면 더 빨리 멀어지고 도망칠 수 있는 도구를 찾았다. 그러는 동안 세상에서 가장 느리면서도 빨랐던 엄마의 등, 안전하다고 느꼈던 따뜻한 등을 잊어버렸던 거다.


걷는 듯 천천히, 걸음마다 흔들렸을 엄마의 숨소리를 상상한다. 어린 나를 자라게 했을 엄마의 등에서 들려오는 숨소리. 내가 잊어버렸던 건 처음 업힌 기억만이 아니라 천천히 나아가며 처음 눈에 담은 세상과 온 마음을 가득 채웠던 따뜻한 온기 그 전부는 아니었을까. 더 멀어지기 전에 한 번 더 어머니의 등이 된 엄마의 등을 안아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