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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Feb 29. 2024

소도시의 적당한 거리가 좋아서

물리적 거리보다 지극히 주관적인 거리감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있어야 한다. 가족이나 연인도 예외가 아닌데 친구나 이웃은 말해 무엇할까. 서울에 살 때로 돌아가보면 가장 엄두가 나지 않는 게 만원 지하철에 몸을 구겨 넣고 출근하거나 퇴근하는 상상이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과 종이 한 장 틈도 없이 가까이 있어도 하나도 행복하지 않았다. 마음이 든든해지거나 어제저녁이나 오늘 아침에 있던 마음 상하는 일에 위로를 얻을 수 없었다. 서로가 여유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왜 조금 더 양보하지 않나를 두고 눈을 흘기거나 나쁜 혼잣말을 하는 일도 비일비재. 소리 있는 아우성, 피 안 나는 전쟁터가 거기였다. 태양을 알고 난 후에는 햇볕의 따스함과 눈부심을 잊을 수 없는 것처럼 소도시의 평화에 흠뻑 젖은 후에는 그 시절로 도무지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밖에서 보는 서울은 거대하고 활동적이며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동경의 대상이다. 하지만 거기서 나온 나는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순수하게 감탄할 뿐이다. 나는 참아낼 수 없던 그 환경을 일상으로 받아들여 아무렇지 않은 듯 잊고 지내는 단단한 내구성과 사다리를 오르듯 조금씩 높고 편한 자리를 만들어 내는 인내심을 바탕으로 한 창조성을 존경한다. 기꺼이 감내하는 그들은 그 모든 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


 N포 세대 속에 내가 있었다.

자발적인 것과 비자발적인 게 섞여있지만 대도시에 살면서 많은 걸 먼저 포기하고 편해졌다. 우선 내 집 마련의 꿈은 일찍 내려놓았고, 결혼이나 아이도 그랬다. 그 외에도 여유로운 여가 생활이나 휴가도 별로 간절하지 않았다. 주말이나 휴일이면 방 안이나 카페 한 자리에 앉아 책이나 읽을 수 있으면 만족했고, 새로 문을 연 서점이나 도서관을 찾아가거나 무작정 걷는 게 여행 같았다. 소박했다. 그리 많은 걸 욕망하지 않음으로써 마음에 평화가 왔다. 이제 와서 그때의 삶이 자발적이었는가 아닌가를 얘기하는 건 별 의미 없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 시간에 의미가 있고 즐거웠으니 지금도 만족하고 있다. N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게 슬프거나 쓸쓸하거나 비참하지 않는가가 중요했다. 한국 사회가 무너진다거나 하는 거창한 문제는 누가 뭔가를 포기했기 때문에 시작된 것도 아니고 뭔가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해결될 수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다 공주까지 와서 정착하고 결혼까지 했느냐는 질문을 지금도 자주 받는다. 솔직한 대답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지만 그럴듯한 대답은 '소도시의 분위기와 환경이 좋아서 잠시 머물기로 마음먹고 지내다 보니 좋은 사람들을 알게 되고 그 사람들을 이웃으로 가끔 만나 차를 마시거나 오가며 인사하며 사는 삶도 좋아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다. 전혀 과장이 아닌 게 결혼 축사를 맡아주신 분들도 공주에 와서 만난 인연이고 축하하러 온 친구들도 공주에서 만난 사람들이 더 많았고(친구가 워낙 없어서) 지금도 가장 의지가 되는 분들이 조금 먼저 공주에 와서 살고 있는 이웃들이기 때문이다. 어디 다른 대도시에서 내가 이렇게 환대받고 가깝게 소통하며 어울릴 수 있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운과 시기와 사람들이 모두 알맞아서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다.


 공주에서 내가 한 건 작은 책방을 직접 만들고 허술하게 운영한 것 하나뿐이다. 한가롭게 차나 커피를 마시고 우연히 만난 동네 사람들과 한참이나 수다를 떠는 게 전부다. 참고 이겨내야 하는 건 언덕 꼭대기에 살기에 겨울에 눈이 올 때마다 치우고 미끄러울 때 언덕 아래에 차를 두고 걸어 올라가는 수고뿐이다. 환경과 사람들 덕분에 내 삶에 필수적이지 않은 무게가 가벼워졌다고 할까.

 나는 소도시 생활을 모두에게 권하거나 찬양하지 않는다. 소도시의 삶이 맞는 사람들이 분명히 따로 존재한다. 마치 문화가 다르고 삶에서 추구하는 바가 극명히 다른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소도시가 마음에 맞고 편안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몇 가지를 빼고는 너무 불편해서 참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지방소멸 시대니까 지방에 사람을 이주시키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거나 모든 소도시가 존속해야 한다는 의견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도시나 지역이 우선이 아니라 사람이 우선이라는 생각에서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도시가 사라진다고 해도 그건 마치 어느 시대에 생물의 대멸종이 일어나는 것처럼 하나의 흐름이 만든 결과라고 받아들일 것이다. 내가 늦추려고 하는 건 소도시의 삶이 어울리는 사람들이 소도시에서 살아보는 경험을 얻지 못하고 포기하는 일이다.


완전하고 완벽한 이주도 좋지만 유예하는, 체험하는 경험도 의미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


 사람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보다 환경을 바꿔보는 게 수월하다. 맹자의 어머니가 바꾼 게 맹자가 아닌 맹자가 사는 장소였던 것처럼 잠시 서울이나 대도시를 떠나도 돌아갈 자리가 아주 사라지거나 영원히 되돌아갈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운이 좋다면 오래 사귀며 교류하고 싶은 사람들, 자신과 너무 다르지만 흥미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만날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해외여행을 떠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같은 나라에 살고, 같은 말을 써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어디에나 있다. 마음 맞는 외국인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과 행정체를 만날 수도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맞닥뜨릴 때 사람은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거나 현재의 자신을 확인할 수 있다. 이해할 수 있는 것만 보고 듣고 경험하는 건 먹기 쉬운 음식만 먹는 것과 같아서 소화의 능력을 떨어뜨리거나 맛을 느끼는 감각을 축소시킨다. 활기는 단순함보다 변화에서 온다. 아무리 정적인 사람이라도 늘 새로운 뭔가를 꿈꾼다. 영역이 다를 뿐, 새로운 것 전부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고 믿고 있다. 


지금 사는 집에 살기 전까지 이런 자리에 있는, 이런 풍경의,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집에 살게 될 거라는 걸 상상해 본 적이 없다. 때로 삶에는 전혀 상상하거나 바라지 않았던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그 계기는 상상해 본 적 없는 어느 장소 혹은 도시에 방문하거나 사람과 만나는 데에서 온다. 상상할 수 없다면 움직여 보는 것도 좋은 이유다. 

대도시에도 주택이 있듯 소도시에도 아파트가 있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이유, 우선순위로 자신의 삶의 자리를 찾고 정한다. 그 선택이나 결정은 선악이나 잘하고 잘못했다는 판단의 대상이 아니다. 이웃집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싶고 뛰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 뛰지 말라고 가르치거나 층간 소음을 막기 위한 매트를 설치하고 싶지 않아서 주택에 살기로 하는 것과 관리의 수월함이나 가까이에 적당한 크기의 마트나 편의점이 있거나 식당 등 편의 시설을 이용하고 싶어 아파트에 사는 삶 모두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늘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고 많은 모임에 참여하고 싶어서 서울 등 대도시를 떠나지 못하는 삶도 가능하고, 겨울잠 자듯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작은 마을에 사는 삶도 가능하다. 


 만족하며 사는 게 중요하지 어디에 사는 게 중요하지 않은 시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감각으로 거리를 느낀다. 삶의 자리를 정할 때 자신의 느낌과 소망을 우선할 수 있는 기회가 조금 더 많은 게 소도시의 장점 중 하나. 소도시의 거리는 절대적이기보다 감각적이다. 500미터도 멀어서 갈 수 없을 것 같기도 하고 10킬로미터도 가깝다고 느낄 수 있다는 거다. 그래서 유연해진다. 절대적 수치보다 지금의 자신의 기분과 마음이 존중받는 느낌이 나를 조금 더 나답게 한다고 하면 너무 과장하는 걸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낀다. 변덕스러운 마음조차 나다. 잘 알다가도 모를 것 같은 내 마음과 가깝게 느끼다가도 먼 듯한 소도시의 거리감이 닮아 있어서 이곳의 삶을 한 번 더 긍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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