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카페의 노래』카슨 매컬러스_장영희 번역
작가는 저마다 다른 이유로 쓴다.
어떤 작가는 기록자다. 사심보다 사실을 쓰려하고 자기 결론보다 단서 제공과 정황 전달에 힘쓴다. 어떤 작가는 고발자다. 시대와 역사, 많은 사람들이 눈을 돌린 사건과 진실을 직시하도로록 외치고 다닌다. 어떤 작가는 고백한다. 너무 늦어버린 후회와 미련, 오해와 잘못, 머뭇거림과 엇갈림이 안기는 무게를 내려놓고 싶어 한다. 어떤 작가는 통곡한다. 소리 대신 글로, 자기의 이름 대신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눈물 흘린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모든 구분은 무의미하다. 모든 이유는 뒤섞인다.
『슬픈 카페의 노래』를 두 페이지째 읽었을 때 어떤 예감이 왔다. 아직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음에도 확신하게 하는 예감이었다. 이 소설은 비극일 거라는, 소설 속에서 누구도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 말이다. 스포일러가 되는 건 즐겁지 않으므로 확신이 맞아떨어졌는지 아닌지는 읽는 이의 몫으로 남긴다. 행복이나 불행은 당사자가 아닌 이상 감히 판단할 수 없으니.
절반 정도 읽었을 때 우연히 번역자인 장영희 교수가 오래전 세상을 떠났다는 걸 알게 됐다. 몰랐다면 평소처럼 책을 다 읽고도 역자의 말이나 해설은 건너뛰었을 것이다. 그리고 소설을 대하는 마음도 지금과 달라졌을 것이다. 소설 감상에 작가의 결코 평탄했다고 할 수 없는 생애에 이입한 이야기를 적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알아버린 이상 모르던 때로 돌아갈 수 없다. 남의 사랑 얘기를 남 얘기처럼 읽고 쓰려던 처음 생각은 글이 되기 전에 길을 잃었던 것이다.
『슬픈 카페의 노래』는 어떤 사랑 이야기다. 소설에도 나오고 역자의 말에도 인용되는 사랑에 대한 정의는 이렇게 시작한다.
우선 사랑이란 두 사람의 공동 경험이다. 그러나 여기서 공동 경험이라 함은 두 사람이 같은 경험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랑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있지만, 두 사람은 완전히 별개의 세계에 속한다._『슬픈 카페의 노래』_50페이지
이 정의는 어긋난 사랑뿐 아니라 이룬 사랑에도 적용된다. 사랑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두 사람이 하나의 세계에서 살게 되는 건 아니다. 사랑은 교차할 수 있을 뿐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이야기의 시작부터 언급되듯 미스 어밀리어는 사팔눈을 하고 있다. 그녀가 처음 결혼한 상대는 망나니에 난봉꾼이었다가 어밀리어를 사랑하게 되면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어밀리어의 사촌이라며 등장하는 라이먼도 꼽추다. 시간 배경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쯤 되는데 무대인 마을은 큰 길이 100미터 정도에 특별한 가게나 건물도 없고 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조금 큰 도심이 엄청나게 먼 것처럼 그려진다. 50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왕복하는 건 대단한 사건이고 마을 사람들이 처음 보는 눈이 내린 날에는 큰 재앙의 예고인 듯 조심하거나 신기해하고 놀라는 순수함도 남아 있다. 고작 100년 동안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미스 어밀리어를 알기 쉽게 표현하는 문장이 있다.
어밀리어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질 때는 오직 그들을 이용해서 돈을 벌 때뿐이었다. 『슬픈 카페의 노래』_13페이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미스 어밀리어는 내내 혼자 지냈다.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데 인색하고 돈을 버는 일에 몰두했으며 지나칠 만큼 소송에 집착하면서도 아픈 사람들을 치료할 때는 돈을 받지 않았다. 이 신기한 사람이 사랑에 빠진 후 완전히 변해버린다. 망나니에 난봉꾼이던 전 남편이 완전히 변했듯 말이다. 이상적으로는 사랑의 상대가 있거나 없거나 좋은 방향으로 변한 모습을 이전으로 되돌릴 필요는 없다. 오히려 좋은 방향의 변화가 또 다른 사람과의 만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다면 인생이든 소설이든 너무 밋밋해지는 걸까. 거의 모든 사랑이 비극이라는 생각에 공감하는 때가 더 많지만 그럼에도 밋밋한 희극이 오히려 보통의 삶에 가까울 것만 같다.
우리말, 우리글로 된 소설조차 해석이 분분하기 마련이다. 작가의 인생, 작품 창작 배경, 소설을 쓰던 시대, 생각할 게 얼마든지 있다. 외국어였다가 한 번역가를 통해 소개된 작품은 복잡함이 제곱이 된다. 작가의 배경에 역자의 배경이 곱해진 셈이니 얼마나 난해한가.
줄거리를 감추고, 결말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소설 감상을 적는 건 늘 어렵다. 소설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내용, 문장을 인용하고 싶은 욕심을 참는 게 특히 그렇다. 결국 쓸 수 있는 건 이 소설을 다른 누군가도 읽었으면 하는가 아닌가 하는 이야기뿐이다.
나는 이 소설을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싶다. 중편 정도 분량으로 너무 길어서 어렵다거나 지루하기 전에 끝나기도 하고 마지막까지 '그래서 대체 나한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하며 어리둥절한 기분이 되는 사람이 하나라도 더 늘었으면 해서다.
알 수 없음.
사랑을 이야기하는 소설을 읽고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 아닌가.
뭔가 알 듯하면서 당혹스럽고 뭔가 싶은 기분이 '사랑은 이것이다!'하고 확신하는 마음보다 커졌으면 좋겠다. 지나간 사랑을 떠올리며 슬픈 노래를 부르거나 듣고 싶어 지더라도, '사랑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기를.
알쏭달쏭한 마음, 밤이 스승이다.
지금 내 마음을 긍정한다.
(황현산 작가의 책 중에 '밤이 선생이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