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지는 저작자와 책임 있는 독자의 시대를 기대하며
소시민이란 때로는 자신의 혼잣말에도 벌벌 떠는 사람들의 다른 이름이다. 또한 우리가 만든 적 없는 원칙에 우리의 상식이 배반당하는 일상을 참아내는 사람들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2025년 6월 3일까지도 참아내는 일, 인내하는 삶이 내 것인 줄 알았다. 하나의 예로 지난겨울 탄핵 국면에 답답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어느 무명인의 시국선언’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고는 일주일 넘게 마음 졸였다. 농담처럼 '헌법 재판소에서 탄핵이 기각되고 그 후에 혹시 제가 없어지면 주변에 좀 알려주세요’하고 지인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농담이 분명한 내 말에 다들 웃었지만 함께 웃고 싶던 나는 그저 웃을 수가 없었다. 표현의 자유, 정치적 의사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민주주의 사회라는 걸 알면서도 잠시나마 두려웠던 건 주권자라는 말이 우스워진 3년을 보내면서 심지가 풍화된 탓이 컸다. 한 사람의 진지한 고백을 두고도 조롱하고 비웃기 위해 그 고백 일부를 가져다 쓰는 일이 흔한 시대였으므로, 극단적 결말에도 누구 하나 반성하거나 책임지거나 사과하지 않는 사건이 반복됐으므로, 마땅히 비밀로 남았어야 할 고민 상담이 소설이 되어 세상에 공개되는 사건을 목도했으므로. 국민을 위한다며 국민에 반대하는 일을 하는데 저명한 이들의 유명한 말들을 가져다 쓰는 일이 흔했으므로 끓는 마음이 까맣게 타버린 후였다.
저작권 관련 글을 공모한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됐지만 글을 쓸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저작권이란 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하는 소시민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뀐 후 벌어진 몇 가지 사건들로 마음이 움직였다.
시작은 어느 기사 제목이었다. 이재명 대통령 사진을 배경으로 한 제목에 '찢어진 태극기'라는 자극적인 표현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또 어느 기자가 나쁜 이미지를 상기시키려는 좋지 않은 의도로 제목을 적었나 보다' 싶었는데 나중에 보니 언론사 한 곳이 아니고 여러 곳에서 '찢어진' 혹은 '찢긴'같은 표현으로 이재명 대통령의 태극기 배지를 기사화하고 있었다. 태극기 배지의 진실을 알게 된 건 SNS 이용자의 글을 통해서였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지금이야말로 나라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것이 중요한 때라는 의미에서 이 배지를 달아줬다"는 3. 1 운동에 쓰인 보물 진관사 태극기라는 것이다. 출처나 의미와 별개로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해 저작물이 왜곡된 사례였다.
두 번째는 한 유명 출판사에서 출간한 도서의 저자 이력과 추천사가 허위 혹은 가짜였다는 사실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해당 사실을 알게 된 출판사는 저자에게 문의했으나 답변을 듣지 못했다며 법적 대응을 시사했고 다음 날 저자의 사망 사실이 알려졌다. 출판사는 저자의 SNS 상에 게시된 게시물의 내용, 이전에 다른 유명 대학에서 강의를 진행했던 이력을 믿었다고 밝혔다. 출판사가 저자를 신뢰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좋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이력이나 추천사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는 과정조차 소홀히 했다면 이 사건의 책임이 모두 저자에게 있다고 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졌다. 한 저자의 저작물이 한 회사의 신뢰를 갉아먹는 계기가 되거나 누군가의 목숨마저 좌우하는 현실이 준 충격이 몹시 크게 다가왔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싶은 대로 읽고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한다. 전부를 듣기보다 들리는 부분만 듣거나 들려주는 부분만 듣고 거기서 만다. 일부분을 전부라고 믿고 확신한다. 나중에는 누가 한 말인지도 모르는 말이 당사자에게 닿기도 한다. 당사자는 그야말로 황당한 지경에 처한다. 해명하고 싶어도 누구에게 해야 하는지 어디서부터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해명을 한다 해도 믿어주기는 할는지 두루 고민하다 포기해 버리는 일이 흔하다. 이것 역시 소시민의 일상이었다.
출처나 진위여부보다 누가 선점했는가와 어떻게 인식되는가가 더 중요해 보이는 착시 현상도 흔하다. YouTube 등 영상이 활성화되고 여기에 A.I 기술이 광범위하게 활용되면서 문제는 급속히 확대되고 심화되고 있다. 당사자가 진실이 아니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은 적어도 소시민에게는 옛말이 아닌 현실이다. 저작권을 법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면 자신의 권리를 두고 다투겠다는 의지 표현 밖에 되지 않는다. 대다수의 소시민에게 법은 가깝기보다 멀고, 자세히 알기보다 모르고 사는 게 마음 편한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민들에게 저작권이 어떤 모습으로 기여할 수 있을까.
소시민답게 근시안적인 말이라는 비판이 뒤따를 수도 있겠지만 몇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첫 번째, 저작권이 법적인 권리 보장을 위한 다툼의 근거로 쓰이기보다 저작자의 저작 혹은 창작에 대해 책임지는 모습과 독자 혹은 이용자의 책임감 있는 모습을 만들어가는 데 기여했으면 한다. 책임지는 창작자란 자신의 저작 혹은 창작의 소재 혹은 내용에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지인과의 실제 대화를 소설에 싣고 '문제 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건 책임지는 창작자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또한 책임감 있는 독자 혹은 이용자란 저작자의 저작 혹은 창작물에 대한 평가, 일부 혹은 전부에 대한 활용, 본래 취지나 의도와 달리 왜곡된 해석으로 발생하는 문제 혹은 논란에 대한 책임 모두를 감당하는 모습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본래의 의도나 내용과 다른 해석 혹은 악의적 편집으로 저작자를 조롱하거나 공격한다. 그런 조롱이나 공격이 문제가 되면 '의도는 없었다'거나, '오해였다'거나 하는 식으로 회피하는 데 그친다. 사과하지 않는다. 사과를 하더라도 진심을 담지 않는다.
두 번째, 권리인지 책임인지 명확해졌으면 한다. 현재는 마치 흡연자의 흡연할 권리와 비흡연자의 건강권이 충돌하는 식으로 저작자의 저작권과 독자 혹은 이용자의 저작물 활용 등에 대한 책임과 권리의 다툼이 너무 복잡해 보이기 때문이다. 구성이나 뉘앙스가 명확히 유사해도, 저작 시점의 전후가 명확해도 1차 저작권자가 2차 저작권자들 혹은 무단 사용자들에 대해 삭제 혹은 인용 명시, 보상 등을 요구하기 어려운 것으로 안다. 소수의 저작자, 창작자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작가, 저자들은 자신들의 삶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세상조차 다 감당하지 못한다. 밖으로 쏟아낼 수단이 오직 저작, 창작인 이유다. 그들에게는 다툼, 소송에 쓸 여력이 없다.
세 번째, 권위를 우선하는 문화보다 논의를 존중하는 문화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저작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인플루언서의 힘이 어느 시대보다 무서운 시대가 요즘이다. 진실이나 사실보다 영향력 있는 누군가의 한 마디가 더 강한 설득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다툼에서 이기기 위한 칼날로써의 저작권이 아니라 존중의 바탕이 되는 근거로 무게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로 나아가는 방법을 찾는데 힘써 주었으면 한다.
자신이 올린 글이나 게시물에 엉뚱한 해석이 달리거나 위안을 받고자 했던 얘기가 비판에 시달리는 계기가 되는 일은 거의 누구나가 경험했을 것이다. 오해가 흔해진 만큼 이해가 드물어진 시대이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권리는 성숙한 사회로 나아갈수록 다툼 없이 보장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믿는다. 저작권 역시 서로를 존중하고 자연스럽게 논의로 나아가는 문화가 성숙해진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세계를 만드는데 기여하는 큰 힘으로 작동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