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연민하지 않는다

오늘이 시작하기 가장 좋은 날

by 가가책방

KakaoTalk_20250717_114412372.jpg 상점 안 화분들

둘째 날이다. 자리를 옮겼다. 가게 밖이 잘 보이는, 비가 안에서 내리는지 밖에서 내리는지 모를 만큼 빗소리에 가까운 자리다. 빨간 자동차, 까만 자동차, 하얀 자동차, 쿠팡 자동차가 멈췄다가 자기 갈길을 간다. 어, 배송 올 물건이 없는데, 기사님이 나를 향해 올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먼저 문을 열고 '옆에 옆에 할아버지 댁 물건이에요' 알려준다. 알려주는 몇 초가 미안할 만큼 비가 쏟아진다. 우산 없이 흠뻑 젖는다. 어릴 때 이런 날은 꼭 그렇게 홀딱 젖고 돌아와서 엄마한테 혼났는데. 놀이와 일은 어떻게 다른가. 왜 이토록 다른 세계를 바라보게 하는가. 저게 무슨 색이더라, 아, 카키색. 카키색 자동차가 오른쪽 방향 지시등을 켜고 지나간다. 오전인데 저녁 같기도 하고, 시간이 가는 건지 멈춘 건지. 차가 지나다니는 걸 보면 가긴 가는 것 같은데. 자동차는 그만 보자. 아, 저건 쓱. 여기까지만.

우르릉 소리가 울린다. 어디서 번개가 쳤나. 지난밤 문득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번개를 신처럼 생각한 이유가 이런 거겠군 하며 사방에서 번쩍 거리는 불빛을 오래 바라봤다. 드물게 가까이 떨어지는 큰 번개와 천둥소리에 깜짝 놀라면서. 서울 번호로 전화가 온다. 받을 일은 아니지. 높은 확률로 광고일 테니. 그러고 보면 요즘엔 광고도 뜸한 기분인데,

시작해야지 생각할 때까지만 해도 "오늘이 당신이 생각하는 걸 시작하기 가장 좋은 날이다"로 시작해야지 생각했는데 비가 워낙 내려서 그런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어젯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글쓰기 수업이 가능한가'하는 생각과 '오늘 못 가요'라는 연락이 갑자기 와도 어쩔 수 없겠다 생각하며 마음을 비웠다가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오지 못하게 된 사람들을 제외하고 그 비를 뚫고 모두 모인 걸 보면서 그 마음과 한결같음에 감탄했다. 그렇게 밤을 지내는데 비가 그치지 않더니 아침에는 또 아침의 비를 쏟아내는 걸 보면서 어제 이러저러한 이유로 못 오겠다고 했다면 오늘도 못 왔을 테고 다음 어느 날에도 다른 이유로 오지 못하게 됐겠구나 싶어지는 것이다. 뭔가를 하려고 한다면, 하고 싶다면, 시작하기 가장 좋은 날은 바로 오늘, 지금이구나 하는 흔한 말이 내 삶으로 들어오는 순간이다. 말은 공허하지만 경험은 실체도 있고 무게도 있고, 비를 맞는 일을 두고 생각하면 젖어오는 옷, 머리, 피부 감각과 불쾌 혹은 상쾌함, 눅눅함이나 찝찝함 같은 불편과 씻어낼 때의 개운함. 이 모든 게 말이 아닌 경험이 주는 실감. 10분 사이에 비는 제법 잦아들었는데 언제 변덕을 부려 다시 쏟아낼지 모를 일이고, 우산을 드는 게 의미가 있는가 싶을 때가 있는가 하면 차라리 맨발로 걷던 옛날 어린 날이 떠오르기도 해서 돌아가볼까 싶어지기도 하고. 어제 밖에 내놓으면서 걱정했던 화분들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골고루 넉넉한 비를 머금어서 싱싱해졌다. 물을 아주 안 주는 것도 아닌데 떠서 주는 수돗물과 하늘이 주는 빗물이 이렇게 다른 건 왜인가. 괜히 반년 내내 물만 주었던 게 미안해지네. 아무리 부어줘도 부족한 게 있는 걸까. 아니면 솜씨 없이 부어줘서 부족함이 생기는 걸까. 혹시 내가 주는 걸로 부족했다면 어디서 무얼 찾아서 채워줘야 하는 걸까. 도대체 언젠가라고 하는 언제쯤에는 채워줄 수 있는 걸까. 모두 모를 일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 내리는 비가 언제 그칠지도 모르겠고, 오늘 손님이 올지도 모르겠고, 저녁은 뭘 먹을지 모르겠고 저녁까지 갈 것도 없이 점심에 뭘 먹을지도 모르네. 엉겁결에 치과에서 스케일링을 하고 왔는데 1년 반 만이었고 의사 선생님은 다 간당간당하다고. 차라리 시한부 선고가 낫다고 쓰려다 멈칫한다. 시한부가 나을 수가 없지. 간당간당 80, 90이 아무렴 압도적으로 낫지. 틀림없다. 간당간당해서 고맙다. 앞으로도 불편을 느낄 때마다 오시라고. 네. 그럴게요. 올리브 나무와 이웃 어른에게 받은 화분 둘이 눈에 걸린다. 잠깐 밖에 내놓고 와야지. 잠깐 다녀온다고 하고 시작한 게 화분 여덟 개를 네 차례에 걸쳐 밖에 두는 거였고 잔뜩 젖었다. 어, 노트북에 물 떨어졌다. 닦아 냈다. 아, 어쩌다가 화분 부자가 되어서 음, 행복하네. 말을 바꿔본다. 골고루. 그러고 보면 비는 쏟아붓더라도 골고루 쏟아붓는다. 적어도 화분 하나만큼에는 골고루, 공평하게. 서로 자기가 더 많이 받았다거나 더 좋은 걸 받았다고 다투지 않아도 된다. 시기하거나 비교하지 않는다. 넉넉하게 쏟아지거나 조금 모자라게 쏟아져도 서로 얼마간 뿌리를 뻗고, 줄기를 푸릇하게 할 만큼은 되는 거다. 다투지 않는 마음. 내일로 미루지 않는 마음. 아마 거기에 특별함이 있지 않을까. 지나가며 두 분이 대화를 하는데, 남자는 '어딘지 알아야지'라고 하고 여자는 '아니, 집이 좁으니까'라고 하며 갔는데 무슨 대화인지 영문을 모르겠다. 또 번쩍. 오늘도 하루 종일 내리칠 모양이다. 저 번쩍임 뒤에는 늘 비가 거세지던데라고 하려는 와중에 비가 거세진다. 뒤늦게 우르릉. 15초는 넘는 간격이 있는 걸로 봐서 4, 5킬로미터 바깥에서 떨어진 낙뢰다. 계룡산 즈음인가.

해가 졌나 보다. 더 어둡다. 사실은 해는 늘 떠있는 셈이니 구름이 두터워졌다고 봐야겠고 노트북 화면 아래 예상되는 강수량은 1미리라고 하는데 이미 몇 분 사이에 1 미리는 내린 것 같고 문득 100미터 앞에 복원 설치해 둔 조선시대 충청감영 측우기가 떠올라서 조금 이따 보러 가야겠다. 일 하라고 여기저기서 메시지가 온다.

자동기술하기엔 일의 압박이. 오늘은 여기까지.

둘째 날이다. 부디 무사히 이 비가 지나가기를 기도하며. 그 사이에 앞으로 2미리의 비가 예상된다로 노트북 화면 아래 문구가 바뀌었다. 이러다 50미리 가겠어. 끝이라고 쓰고 보니 한 번더 하고 싶은 말이 떠올라서. 뭐든 시작하려 한다면 오늘이 가장 시작하기 좋은 날. 오늘부터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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