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은 욕망의 하녀다_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

불안_알랭 드 보통

by 가가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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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은 다양한 모습을 하고 찾아든다.

어떤 불안은 사랑과 같은 개인적인 관계에서의 '두려움'의 형태로 찾아들고, 어떤 불안은 지위나 권력과 같은 사회적 관계에서의 '소외감'의 형태로 찾아든다.

얼핏 두려움이 소외감보다 더 불안의 크기가 클 것 같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소외감이 두려움보다 더 커다란 불안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인간은 흔히 말하는 것처럼 '사회적 동물'이기에 '더 사랑받는 것'보다 '관심조차 얻지 못하는 것'에서 더 커다란 괴로움을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 속에서 알랭 드 보통은 Status, 즉 지위에서 오는 불안에 대해 이야기한다. 원인을 짚어보고, 그 불안에서 놓여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해보는 거다. 이 지위란 단순히 서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의 지위와 사회나 회사에서의 지위 같은 '인정'과 관련된 지위다. 흔히 '훌륭하다', '출세했다', '인기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만드는 요인들이 바로 '지위'인 거다.


사람들은 이 지위를 손에 넣기 위해 많은 것을 한다. 삶의 거의 모든 시간을 할애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노력들은 대부분 기대하는 것만큼의 만족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결국 사람들은 애쓰고 노력함으로써 불안이라는 왕관을 얻게 되는 셈이다.


현대에 들어선 이후 사람들이 인정하는 지위란 대부분 '외적인 소유'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인다. 추측해보건대 내적인 가치는 눈에 보이지 않기에 드러내기 어려워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지혜로운 사람이 자신이 지혜롭다며 뽐내고 다닌다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법이다. 하지만 돈이 많은 사람이 명품을 두르고 다닌다면 사람들은 '천박하다'고 말은 할지 몰라도 외적으로는 찬사와 인정을 보낸다. 그가 더 많이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그 사실이 자신에게 어떤 반사적인 이익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들로 결국 지위를 증명하는 것이 '소유의 여부'가 되어버린 것이 현대 불안의 가장 커다란 원인인 것처럼 보인다.


세상에는 소유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그리고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자기보다 더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을 바라본다. 자기에게 없는 것을 부러워한다. 그것들을 소유하지 않았기에 자신이 관심받을 수 없으며, 하찮은 존재가 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남들은 다 갖고 있는' 것을 갖지 못하면 그것이 불안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우스갯소리지만 '등골 브레이커'니 하는 것들의 그 태생은 필연적이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갖지는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 만큼은 갖고 있어야 불안이 덜하다고 느끼는 거다. 그러나 결국은 불안을 피하기 위해 더 많이 소유할수록, 더 높이 올라갈수록 불안이 커지는 것은 막지 못한다.


이제는 가진 것을 잃어버리는 것까지 불안함의 원인에 더해졌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들은 두 가지로 불안해하게 된다.

하나는 '소유하지 못한 불안'이고, 다른 하나는 '소유한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이다.

어떤 책들은 '모두 내려놓으라'고 손쉬운 해법을 제시하지만, 그게 가능했다면 처음부터 불안해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모두가 수도자도 아닌데 어떻게 모든 욕망을, 모든 욕구를 내려놓을 수 있다는 말인가? 수도자들 조차 내려놓기 위해 평생에 걸쳐 수행을 거듭하고 있는데 말이다.


알랭 드 보통은 이 책 속에서 사람들의 '불안'을 들여다보고, 해체해서 불안의 정체를 밝히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고 나서는 그 불안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제시한다.

지난해 출간 이후 오랜 시간 인기를 누리고 있는 베스트셀러 <미움받을 용기>에서는 '인정의 욕구를 버리라'고 말한다. 알프레드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에 관심이 있었고,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또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정말 인정의 욕구를 버리면 행복해질 수 있을지는 의문스러웠다. 알랭 드 보통 역시 <불안>에서 인정으 욕구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인정의 욕구를 좀 더 근원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내 견해 역시 알랭 드 보통 쪽에 가깝다. 인정의 욕구를 버리면 남는 것이 무엇일까? '과도한 인정의 욕구'를 버리라는 말이었다면 조금 납득이 간다. 무리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일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원천적으로 인정의 욕구를 버리고 나면 자기 자신만이 남을 것인데,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자신만으로는 삶에서의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 결국 돌고 돌아 인간이 사회적인 관계와 지위라는 상태 속에만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결론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이 불안의 원인으로 지목한 것은 다섯 가지다.

'사랑 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

다섯 가지 모두가 현대 사회에 차고 넘치도록 가득한 것들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불안에 대한 해법으로 제시하는 것도 다섯 가지다.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

다섯 가지 모두 뭔가 멀고 또 가까이 하기 힘든 낯선 것들이다.

철학에서 답을 찾는 이가 얼마나 될까?

금전적 가치보다 우선되는 가치가 현대 예술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가?

정치는 이제 말만 들어도 질색팔색 하지 않던가?

우리나라에서의 기독교란 그렇게 이미지가 아름답지는 않은 것 같은데?

보헤미아, 이름도 이미지도 멋지지만 결국은 '루저'로 분류될 것 같지 않은가?


해답에 대한 물음들은 그냥 적어 본 것이다. 하지만 아주 틀린 견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왜 불안이 갈수록 늘어나는데도 사람들이 해답을 찾지 못하는지 아주 간단히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하다.

사람들은 해법이 담긴 것은 멀리하면서, 원인은 점점 늘려가고 있다.

불안이 커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사회적인 지위 혹은 사회적 관계에서 불안을 느낀다면 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일단 왜 불안한 것인지, 그 불안이 무엇인지, 불안을 줄일 수는 없는지, 방법은 무엇인지 알아야 대처할 수 있을 것 아닌가.


다만,

불안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사랑 결핍'이 있지만,

이 사랑 결핍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의 사랑에 대한 불안에는 해답이 되기 어려워 보였다. 마찬가지로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의 사랑 결핍에 대한 해답이 되기에도 부족하다고 여겨진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관계에서 생겨나는 불안은 '지위'로부터 생겨나는 불안과 닿아 있기는 하지만 일치하지는 않는다. 사람의 마음이란 대단히 섬세한 것이라 '일치하지 않는 것'을 단지 비슷하다고 해서 적용시켜 봐도 불안이 덜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은 스스로 생각하고, 함께 극복해 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것 아닐까.


"불안은 욕망의 하녀다."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욕망하기에 불안해진다는 거다. 욕망을 줄이면 불안도 줄어들겠지만 세상은 욕망을 줄이라고 가르치기보다 더 많은 것을 욕망할 수 있다거나, 더 많이 욕망해야만 한다고 한다. 더 많은 '욕망해야 할 것'을 보여주고, '그 욕망해야 할 것을 소유한 사람들'의 삶이 무척 아름답고 행복한 것처럼 이야기한다. 지금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욕망하지 않기 때문이며, 욕망한 것을 손에 넣으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속삭인다. 강요하지는 않지만 더 자주, 더 아름답게 보여준다.

소유함으로써, 욕망함으로써 사람은 스스로 불안의 노예가 된다. 그것도 기꺼이, 즐겁게 봉사한다. 그러고 나서 나중에서야 불안함에 떨며 괴로워한다.

무엇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물어 답을 구할 때다. 그 결과 불안을 늘리는 방법을 택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겠다. 사람의 삶은 모순 덩어리라고 하지만 그것조차 그 사람의 삶이기 때문이다.


불안에 대한 진정한 해답이 무엇인지는 스스로에게도 항상 던지는 물음이다. 아직 찾은 것 같다는 실마리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다만 찾기 위해 애쓰고 있을 뿐이다. 불안이 아주 없는 삶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은 불안과 만족 사이의 어디쯤에 있는 균형 잡힌 자리를 찾고 싶은 것이다. 거의 모든 것이 균형의 문제다. 그렇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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