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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개쳐 본 전통의 굴레

슬리퍼 신고 브리지 출입하기

by 전희태
IMG_7849(9461)1.jpg 추운 곳이 아니면 어디서나 편하게 신게 되는 뒤축이 없는 샌들.




예전에는 배 안에서 뒤축이 없는 샌들을 신고 브리지에 출입하는 일은 절대 금기 사항이었다.


지금부터 30여 년 전 내가 처음 배를 타던 시절만 해도 브리지에 올라가는 복장에 대하여는 굉장히 까다로운 예절이 가미되어 전수되고 있었다.


지난 배에서 까지도 브리지에 올라갈 때에는 복장을 깔끔하게 꾸미고 특히 신발은 구두나 단정한 신발을 신어야지 샌들이나 구두라도 뒤축을 꺾어 신는 일이란 아예 생각도 못할 일로 생활해왔었다.


이렇듯 세계를 상대로 한 항상 새로운 문물에 제일 먼저 앞장서 있다고 여겨지는 선원들이지만 브리지에 대하여 보여주는 배 안에서의 전통은 생각과는 달리 매우 고루(?) 할 정도로 굳어 있어 보였다.


이는 항해 중 브리지가 배안에서의 모든 일을 처리하는 선박 중추를 이룬 중요한 곳이므로 위계질서가 필요하고 어느 정도 엄숙함도 가지기 위한 자연스럽게 발현된 전통인 듯 싶다.


지난번 본선에 처음으로 승선하여 브리지에 올라갔을 때 당직을 서고 있든 당직사관의 복장을 보면서 아직까지는 옛날 전통을 고수하며 살았던지라 속으로 굉장히 놀랐었다. 뒤축 걸게가 있는 신발이긴 하지만 어찌 되었든 샌들을 신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지난 세월 중엔 발가락에 무좀이 심하니 어쩌니 하며 그런 편한 샌들을 신으려고 시도하던 사람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약을 바르고 치료를 열심히 잘하라는 말만 해줬지, 브리지에 올라올 때는 언제나 단정하게 구두나 운동화를 신도록 엄숙히 지시되었다. 또 그런 지시를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야 했던 그런 풍토였다.


헌데 이 배는 보아하니 모두가 편한 신발을 신고 심지어는 양말조차 신지 않고 맨발에 샌들을 곁들인 사람도 눈에 뜨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내가 책임지고 타야 하는 배도 아닌데 너무 빡빡하게 선원들을 들볶을 필요도 없고 또 먼저의 담당 책임 선장이 어떤 생각이 있어 그런 풍토를 만들었을 터이니 상관 말자고 작정하여 못 본척하니 넘겨주기로 했었다.


그러던 차에 막상 이 배를 맡은 책임 선장이 되는 입장으로 변하고 보니, 그동안 좀 해이해 보이는 양상을 인정하려든 내 스스로의 태도가 영 맘에 안차게 되었고, 예전의 풍습대로 구두를 신고 당직에 임하도록 분위기 쇄신을 해야겠다는 쪽으로 맘을 굳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번 항차 아내가 방선 차 내려왔을 때, 배 안에서 신을 신발을 구하러 외출 나가서 실내화와 방선 중에 신을 운동화 사는 일을 거들어주게 되었다.


아내의 흥정을 한참 구경하던 중, 갑자기 나도 샌들을 사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 이번에 아예 편한 쪽을 택하여 정장이나 통상복에 구두만을 고집하던 것을 파기하고 항해 중에는 샌들도 어울리는 편한 복장으로 브리지 근무를 해보는 게 어떨까? 맘을 다시 바꾸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샌들일지라도 신발 뒤축이 제대로 있는 신발까지만 허용하고, 신발 신는 태도도 절대로 뒤축을 꺾어 신는 것을 금지한 사항은 계속 밀고 나가기로 맘먹었다.


배안에서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바쁘게 움직여야 할 경우가 종종 생기는데 그런 때 신발 뒤축을 꺾어 신고 있으면 움직임에 지장을 주고, 받기도 하지만, 사실 보기에도 결코 좋은 단정한 광경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제 편한 신발이지만 깔끔하게 착용하고 브리지에 들어서면서 지금까지 내가 지켜 왔던 전통이 과연 현실에 꼭 필요한 일이었을까?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 본다.


너무 형식에 치우친 전통을 과감하게 깨뜨린 것은 잘한 일이라는 결론을 내어보지만, 그래도 발이 너무 가볍게 느껴지는 게 편함에 앞서 아련한 아쉬움도 남겨준다.

전통의 굴레란 것은 이렇게도 걸리적거리는 것조차 아쉬워지는 큰 힘을 갖고 있는 속박의 표상인 모양이다.



PS: 배안에서의 신발 신는 것에 대해 서양 풍속과 다른 점 하나를 덧붙여 본다


%B3%BB%B9%E6%C0Ա%B8(3332)1.jpg 선장방 사무실 출입구 앞에 벗어 놓은 신발 모습.


본선이 외국항에 기항하여 부두에 접안하였을 때 본선을 찾아온 대리점 직원이든가 기타 필요한 일이 있어 선장실을 방문하게 된 서구인들은 선장 방 앞까지 구두를 신고 올라온 후 방 문턱을 넘기전에 신발을 벗어야 하는 동서양의 문화 차이에 조금은 당황한 경험으로 망설임을 가졌었다.

우리는 우리의 문화적인 전통에 의해 복도까지만 신발을 신었고 방안에 들어설 때는 신발을 벗는 생활을 해왔다.

허지만 그들은 방안까지도 신발을 신고 생활하기에 본선을 방문하며 버거워하는 일중 하나가 실내 문 앞에서 구두를 벗고 양말 차림이 되어 들어서야 하는 일이다.


-지금도 그런 배가 있을는지 모르지만, 처음에는 덧신 커버를 준비하여 그들의 불편을 덜어주기도 했지만 우리의 해운이 세계로 확장되는 분위기로 들어서면서부터 그들이 우리의 문화를 따라 행동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질 만큼 세월도 변화된 것이다.


적어도 우릴 상대하는 대리점 직원쯤 되면 신발을 벗고 우리들의 방문을 들어서는 일은 양쪽 모두가 당연한 일로 여기게끔 세월이 우리의 안목을 세워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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