닻을 올리고 도선사를 태우며.
한 밤중 0시 45분에 승선하겠다고 연락이 왔던 도선사가 날씨가 나빠지면서 헬리콥터로 못 오고 보트를 타고 올 것이란 연락을 해왔다. 과연 찜찜하던 날씨가 사나워지기 시작하더니 순간 속력을 30 노트까지 올리며 평균 25 노트는 유지하는 비바람이 불어치고 있다.
도선사 승선 시간에 맞추기 위해 어제 밤 11시 30분부터 닻을 감아 들이기 위한 부서 배치를 했던 선수 부서 팀원들은 그 비를 흠뻑 맞으며 <히브인 앵커>에 임하고 있다.
접안 상황은 우현 접안으로 이어졌으며 선미 부서는 헬기로 오려던 도선사가 보트로 오기 때문에 바람이 적게 영향을 미치는 LEE SIDE인 우현 쪽에다 도선사용 복합 사다리 설치를 해주었다.
비바람에 선체가 자꾸 밀리는 경향을 보여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도선사의 승선은 15분, 10 분하는 식으로 자꾸 늦어지어 불안한 마음을 슬금슬금 증폭시키고 있다.
결국 01시 30분이 되어서 나타난 도선사는 급하게 올라온 표시로 온 조타실 내에 다 퍼지도록 거친 숨소리의 쉼을 내쉰다. 그런 와중에도 나로부터 조선을 인계받아 부두로의 접근을 시작한다.
그동안 도선사가 사용한 사다리는 접안시 방해가 되므로 즉시 철거하는 일을 이번에는 선미 부서에 의해 실시하고 있다.
그 작업이 끝나면서 터그보트의 예인삭을 묶기 위해 선수를 좌현으로 전타, 바람을 막아주어 선수부의 줄을 잡게 하였고, 이윽고 힘들게 줄을 잡고 나서는 다시 우현으로 돌리어 부두를 향한 항진이 시작되었다.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부두에는 우리가 접안할 1번 선석과 이어진 2번 선석에는 이미 선적을 끝낸 파나막스급 선박이 푸-욱 갈아 앉은 모습으로 부두에 묶여있다.
그 배의 꽁무니에 바짝 다가서서 나란히 접안하려는 우리 배의 조선은 어두운 밤, 그것도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이니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선수 쪽에서 들어오는 바람과 조류의 힘에 의해 배가 앞으로 전진하는 힘이 매우 미약해져서 밀리는 경향조차 있어 계속 기관사용을 미속 전진으로 놓고 있다.
그러다 전진 타력이 세어지어 혹시나 부두에 접안하고 있는 앞배의 꽁무니를 추돌하여 받치게 하는 불상사가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 걱정을 접안 작업 내도록 하며 지켜보는 심정도 날씨만큼이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준다.
도선사는 그런 내 마음을 알기나 하는지 조심스레 조선을 하며 앞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조류를 최대한 이용하여 부두에의 접안을 멋지게 끝내준다.
터그보트의 사용은 길게 터그 라인을 묶고는 잡아당기는 작업을 위주로 하여 조선을 하였는데 이처럼 비바람이 심한 경우에 본선의 옆에 닿아서 미는 작업을 할 경우 파도를 타는 본선과 터그보트의 주기가 아무래도 다른 상황이기에 삐끗하면 본선과의 접촉으로 인해 서로의 철판들이 상하는 일도 발생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비바람도 접안을 끝낼 무렵부터 잦아들기 시작하더니 10노트 정도의 풍속으로 내려가 주어 조마조마한 마음 조림을 하던 내 마음을 한숨 돌리게 다독여 준다.
3시 40분 접안을 끝내고 이미 승선하여 기다리고 있는 대리점원을 상대로 입항 수속을 하니 꼬박 날밤을 새운 피곤이 그제야 밀려든다.
다섯 시가 가까워질 무렵 자리에 들어 잠을 청하는데 한참을 잠이 들지 않아 뒤척인 것 같은데 어느새 눈을 뜨니 한잠을 푹 자고 난 7시 20분이 지나고 있다.
서둘러 일어나서 아침에 있을 일들을 대비하려는데 두 번째로 나를 찾은 외부인인 선식 업자가 내일 오전 9시경에 주부식을 전달하겠다고 통보해 주려고 찾아와 있다.
세 번째로 온 사람은 이번 항차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며 대비하고 있던 PSC SURVEYOR로서 Y2K 서류 심사로부터 모든 증서를 열람하여 조사한 후, 브리지에서 시작하여 각종 댐퍼, 구명보트, 비상발전기, 비상 소화 펌프, 기관실로 들어가서 15 PPM 유수 분리기 작동 상황 등 모든 부분을 점검하였다.
무사히 끝난 검사 결과에 만족하며 좀 쉬고 있는데 이번에는 여자 관리가 올라와서 일을 벌이는데 바로 검역관이다.
사실 외국항에 입항할 때 가장 먼저 승선하여 만나게 되는 관리가 검역관인데 이들의 허가가 없이는 어떤 사람들과도 접촉할 수 없는 게 검역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요사이는 <무선 검역>이란 것이 있어 외국항 도착 24시간 전까지 그 항구 검역소에다 그들이 미리 준비한 소정의 질문서에 응답하여 제출하면 입항(접안) 허가를 해주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이 무선 검역 요청에 대한 검역당국의 불가 판정이 나게 되면, 까다로운 실제 검역의 실시가 있게 되고 이때에는 그 누구도 검역관에 앞서 승선할 수가 없는 것이다.
새벽에 수속 왔던 대리점원은 검역도 세관도 안 오고 PSC 검사도 없을 것 같다고 했는데 세관원만 빼놓고 모두가 와서 자신들이 할 일을 챙기어 간다.
무선 검역으로 인정받았기에 그 검역관에 앞서 다른 관리들이 먼저 올라왔지만 검역관들은 무선 검역을 배려해준 배라도 한 번씩 실제로 승선하여, 보고 사항이나 알고 싶은 일을 몸으로 점검하는 방법도 쓰는 것이다.
오늘의 검역관 승선은 내가 보기에는 그녀의 초임 검역관으로서의 자질을 계발하려는 훈련의 의미가 있는 방선이 덧붙여 있는 듯 싶은데 그녀의 FM대로 하는 철저한 검사가 그런 내 생각을 더욱 뒷받침해준다.
우리는 이번 항차 내도록 PSC 검사를 대비하여 준비하느라 다른 일을 돌볼 여가가 없었다. 이제 아무런 지적사항 없이 그 검사가 끝나게 되어 앞으로 최소한 6개월간은 호주 기항 시 PSC 검사로 마음 조리는 일은 없을 것으로 예상됨이 즐겁다.
게다가 검역관의 기습 방선의 현장 점검 결과도 만족스러운 상태로 끝나게 되면서, 인간적인 유대관계도 이루게 된 듯싶은 항해의 완성에 대한 흐뭇함으로 한숨 돌리게 된 심정 역시 흐뭇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