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이 불어와도 해야 할 일은 진행되고 있다.
산 너머 산 첩첩이라더니 열심히 피해 낸 9908호 열대성 폭풍 이건만 이제는 자신의 새끼 같은 996 hpa 짜리 저기압을 꽁무니 쪽에 세워 두고 바쁜 걸음으로 서북서진을 하고 있다.
어미에 달린 새끼 같은 녀석이라면 빨리 제 어미의 뒤를 떨어질세라 바싹 따라가야 할 터인데, 마치 구경거리가 많아 사방을 둘러 두리번거리기에만 열중한 개구쟁이 꼬마 녀석 같이 996 hpa 짜리 저기압은 그 자리 부근에서 꾸물거리고 있어 우리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다.
그렇게 시간이 자꾸 지나가면 그 녀석도 하나짜리의 태풍으로 자라나게 되어, 독립된 개체로 우리를 대하려 할 것이고, 우리는 줄줄이 또 다른 저기압을 만나게 되는 고통을 안게 되는 셈이기에 빠르게 움직여 가는 제 어미와 함께 어서 사라져 주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이제 KS WEATHER를 굳게 믿고 그들이 이야기한 항로를 따라 그냥 항진을 계속할 뿐이지만 시간이 지나가며 달라지는 저기압들의 분포와 세력을 흘긴 눈으로 보며 빨리 이 바다를 벗어나 안전한 곳에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조차 생겨나고 있다.
순간 속도가 40 knots가 넘는 돌풍성 바람을 끌고 와서 마치 동이 동이로 쏟아붓듯이 퍼부어지는 빗물로 인해 갑판 샌드 브라스트(선체의 녹을 제거하기 위해 고압 공기에 모래를 실려 보내 철판을 때려 녹이 떨려 나게 하는 일) 작업 결과로 널려 있던 모래의 지저분함이 일거에 씻겨 나가는 것은 그나마 반갑고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비바람과 함께 따라온 어둠은 우리를 은근히 주눅 들게 만드는 별로인 상황이다.
그런 속에서 새 날이 밝아오며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고 있다.
아침 식사를 하러 일층에 있는 식당으로 내려가던 중, 이층 통로 구석에 놓인 쓰고 남은 왁스와 걸레가 담긴 들통을 보면서 지나쳤다. 목적지인 식당에 도착해보니 아직 식사 준비가 덜 되어 있는 형편이라 다시 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방에 들어서 보니 이틀 전 사무실만 왁스칠을 해낸 상태가 확 하니 눈에 뜨이면서,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좀 전에 봤던 쓰고 남은 왁스로 침실 바닥마저 칠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불쑥하니 떠오른다. 즉시 침실로 들어가 바닥 걸레질을 찬찬히 해준 후 왁스가 남아있던 들통을 가져오려고 아래층으로 향했다.
좀 전까지 들통이 있었던 자리로 갔건만 아무것도 없는 빈자리만 남아 있다. 마침 식사를 끝내고 나오던 갑판장을 만나 물어보니 엊저녁 칠을 한 사관 식당 바닥에 한 번 더 칠을 해주어서 왁스는 남은 것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내 방 침실에 한번 칠하면 되는데 그 정도도 안 남았겠어요? 하니
다시 한 번 알아보자며 화장실 옆 청소도구 정돈함 앞으로 가더니 왁스 들통을 갖고 나온다.
왁스에 담긴 걸레가 아직 젖어 있어 그냥 문지르기만 하면 되니 충분할 것이란 짐작을 하며 받아 들려는데 자기가 해준다며 갑판장은 굳이 왁스 들통을 내주지 않고 내 방까지 따라온다.
휭 하니 왁스 걸레질은 5분도 안 걸려 끝이 났다. 방안은 새삼스레 환해졌고 빛마저 나는 것 같다.
앞으로 한 시간여가 흘러 왁스가 마르게 되면 방안은 진짜로 매끈한 모습으로 변하겠다.
이번 항차 선내 미관에 대해 굉장한 열의를 가지고 전 선원들에게 닦달하다시피 이끌어 전체적으로 배 안이 많이 깨끗해진 걸 몸으로 느끼면서 한결 흐뭇한 보람을 가져본다.
사선들 중에서 환경이 지저분한 배로 동료 선원들 간에 소문 나 있었고 선체 미관도 형편없다는 혹평 속에 운항되고 있든 본선의 상황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개선하여 깨끗한 선박, 앞서가는 배로 거듭 태어날 수 있도록 다독이기 위해서는 우선 주위부터 깨끗하게 정리 정돈을 하는 게 급선무이며 지금 그 준비가 시작된 것이라 믿는다.
비바람이 불어와도 해야 할 일은 이렇게 진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