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증 나는 일들

모든 게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by 전희태
DS0042(7286)1.jpg 멀쩡하던 날씨가 한번씩 몰려드는 비구름으로 인해 비가 오고 바람도 불지만, 무지개도 한번씩 보여주니까,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게 만드는 모양이다.



아프리카 대륙의 남쪽 해안을 휘감아 돌며 달리고 있는 멋진 해류가 있다. 인도양에서 대서양으로 가는 배들은 항상 그 해류의 속력 위에 자신을 실어주어 평소의 실력보다 빠르게 달리는 기쁨을 안겨 받고 있다. 이름하여 AGULHAS CURRENT라는 해류이다.


나는 이 해류의 백을 믿고 SALDANHA BAY의 도착을 15일 아침 6시로 우기듯 못을 박으며 오다가, 그제부터 만나기 시작한 10시 방향의 파도와 바람에 배가 멈칫거리는 일을 당하니 할 수없이 오후인 16시 도착으로 정정하여 ETA 전보를 내었었다.


바로 그 전문을 받자마자 대리점은 13시에 들어오는 경쟁선이 있다는 코멘트와 접안은 도착 즉시 하지만 작업 시작은 24시간 늦어진다는 연락을 해온다.


다시 ETA를 빨라질 수 있게 고칠 방법을 찾아보려는 기대를 가지고 브리지에 올라간 아침나절에 한국말로 된 음성이 VHF 전화로 우리 배를 부르고 나온다. 사선인 오션 프랜드호가 부른 것이다.

전에 오션 마스터호를 같이 승선했던 김 OO 통신장이 그 배에 타고 있어 인사를 하려고 부르고 나선 것이다.

마침 부인과 함께 동승하고 있다면서, 부인은 아침 시간이지만 멀미로 인해 늦잠을 자느라고 인사를 못 드려 죄송하다는 이야기를 곁들여 반가운 인사를 보내 준다.

오션 마스터호 승선중 호주 뉴캐슬 왕복 항해에 함께 동승했던 아주 가정적이고 다정다감하던 그 아주머니를 기억해 내며, 아내의 건강이며 근황을 물어가며 안부를 전하는 그에게 나도 나의 극진한 안부를 그의 부인에게 전해주도록 부탁하며 전화를 끊는다.


어느새 그 유명한 해류를 타고 달릴 수 있는 위치에 까지 도착하고 있는데 막상 생각한 것만큼의 속력으로 늘여 주지를 않고 있다. 아직도 어제까지 불어주던 바람과 파도의 남은 여파로 인해 배의 몸놀림이 계속 분주함을 벗어나질 못해서이다.

남은 거리를 남은 시간으로 역산하여 산출한 ETA (ESTIMATED TIME OF ARRIVAL:도착 예정시각)로 예상되는 속력 표를 만들어 보니, 15일 12시에 도착하려면 13.3 노트 정도의 속력이면 가능하여, 우선 13시 도착 예정이라는 경쟁선을 제칠 수 있는 12시로 수정 ETA를 내어 주며 선용금의 전도 청구도 함께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온 대리점의 전보는, 이번의 전도금을 어떻게 잔돈 분할을 하여 갖다 주면 되는지를 물어 온다.

이렇게까지 돈의 전도에 친절한 대리점은 아프리카에서 처음 만난다.


100불짜리로 6천 불, 20불짜리로 2천 불, 10불짜리로 8백 불, 5불짜리로 100불, 1불짜리로 100불이 되게 해 달라고 전보를 넣었다.

잠시 후 CAPE TOWN RADIO에서 이미 신청 전보를 내었던 무선 검역이 통과되었다는 전문도 전해준다.

속력이 슬슬 오르기 시작한다. 바람도 곁따라 바로 뒤에서 밀어주는 북동풍으로 바뀌었고 풍력도 조금 늘여준다. 달리는 말에 채찍질하는 식이다.

파도가 하얗게 피어나는데도 배는 별 움직임이 없이 잘도 달리고 있어 요 며칠간 죽을 쑤듯 미적거린 거리를 다시 돌려받게 하고 있다. 이른바 파도 타고 달리는 속력의 증가가 시작된 거다.

평균 15노트라는 속력을 내고 있어 15일 12시 도착에 점점 더 청신호를 보내주고 있어 마치 이런 일 때문에 배를 탄다는 애교를 부릴만한 기분도 든다.


위성 전화의 벨이 울린다. 부산의 선단에서 담당 감독이 걸어온 전화이다. 이곳에서 타선사 선박이 PSC 검사를 받은 적이 있으니 그에 대비하여 사전 준비를 잘 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나도 내가 타고 있는 동안에 그런 것에 걸리는 일 따위로 손가락질받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기에 잘 알았다고 이야기하며 전화를 끊었다.


이런 상황을 식사 시간에 전해 듣는 기관장이 배가 육지에 들어가면 쉴 수 있다는 기쁨에 즐거워야 할 터인데 오히려 요즘엔 육지에 들어가기가 무섭다고 농담한다.

사실 그건 농담의 목소리이긴 하지만, PSC 수검 시에 받을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항구에 기항하는 것도 별로 반갑기만 한 일이 아니라는 그 말이 요즘 배 타는 사람들의 심정을 너무나 잘 나타내 주는 듯싶다.


맞는 말이다. 우리들은 항구에 들어가면 그곳 항만 당국의 검사관에 의한 각종 검사의 수검을 염두에 두고 항해 중의 쉬는 시간도 반납해가며 일해 온 결과를, 마치 우리들의 어린 시절 숙제를 해 가지고 온 아이들이 혹시나 틀린 것을 발견하여 선생님이 무어라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으로 가슴 졸이며 숙제 검사를 받던 때처럼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불안한 마음으로 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보다 국민 수준이 떨어진다고 생각해 어느 정도 우습게 보고 있는 형편인데, 기항 시 그들로부터 PSC 검사를 까다롭게 수검할지도 모른다는 정보를 받고 보니, 어이없기도 하고 화도 은근히 나서, 배알 마저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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