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번 부두 끝에서 시내 쪽으로 연결되어 있던 도로는 막혀버리고
겉으로 보기에는 전에 왔을 때와 별로 달라진 것 없어 보이든 리차드 베이 항이다.
하나 시내로 상륙하면서 보니 크게 달라진 게 한 가지 있다.
시내로 나가는 도로가 예전에는 301번 부두에서 그냥 빠져나가면 되었는데 지금은 그곳을 막아 놓고, 반대쪽의 끝단인 304번 부두에서 저탄장을 빙 돌아서 나가는 도로 망을 새로 개방해 둔 것이다.
돌아나가는 길이 예전의 길보다는 운치도 있고, 원숭이가 나무를 타며 노는 모습도 지나치며 볼 수 있어 좋아 보이지만, 시내까지의 거리는 제법 늘어나 버렸다.
부두에 있는 작은 선물가게를 찾아가서 집으로 전화를 걸었을 때, 요금을 달러로 환산하여 지불하였는데 되받아야 할 거스름돈을 달러로 내주지 않고 과자나 사탕 등 먹을 것으로 가져가라고 부추기는 수법도 이 가게를 처음 들렸던 예전과는 어딘가 달라진 분위기이다.
좀은 뻔뻔한 인상으로 보였던 종업원의 얼굴이 그런 행동으로 인해 더욱 개기름이 번쩍이는 밉상으로 보였다.
선적 작업도 모두 끝나고 서류 정리까지 끝난 후 출항에 대비하여 마지막으로 현문 사다리의 연결 발판을 걷어 올리기 위해 작동시킨 PROVISIONS CRANE이 말썽을 일으켜 걸어 놓은 발판을 들어 올리지 못하는 먹통 되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우리가 빠져나갈 자리에 교대로 들어와서 접안하려는 배 조차, 이미 옆에 와서 빨리 비켜 달라는 독촉이나 하듯이 후진 기관 사용을 하며 허연 포말을 선미에서 일으키고 있다.
고장을 해소시키기 위해 불러 올린 기관사는 고장 상황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얼른 크레인을 타고 올라가서 리셋 버튼을 만지고 다시 작동을 시키고 있다.
고장이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그렇게 손을 봤는데도 한번 움직이더니 다시 말을 듣지 않는다.
자꾸 늦어지는 상황에 그런 광경을 보니 욕이 절로 나오려는 걸 참으며, 우선 손으로라도 끌어올릴 수 있게 해 놓고 출항부터 하자고 큰소리로 지시한다.
후부 갑판 부서의 부원들 모두 나서서 힘을 합쳐 끌어올린 후 묶어 주는 걸 보고 <올라인 렛고>를 명령했다. 그동안 시간은 10여분이 지나갔다.
선수부에 터그보트 한 척만 잡았다. 그 예인선이 잡아당기어 선수를 부두에서 떼어놓을 때 선미 쪽은 계류삭의 안전 수납된 상태를 확인한 후 엔진을 사용하여 서서히 부두로부터 벌어지게 만들고 있다.
그렇게 우리 배가 완전히 빠져나온 자리에 기다리고 있던 배가 앞 뒤로 붙은 터그보트의 도움을 받으며 슬그머니 교대하여 들어선다.
선수를 포함하여 모든 계류삭을 안전히 거두어들이고, 출항의 항로에 접어드는데, 도선사는 예전에는 없었던 헬리콥터로 하선할 것이라 한다.
그동안 달라진 일이 하나 더 추가된 일이다. 후부 담당 2항사에게 6 번창의 헬리포트에 도선사 하선 준비를 하고 기다리도록 지시했다.
이윽고 방파제 부근에 접근할 무렵, 헬리콥터의 굉음이 뒤에서 점점 커지며 들려온다.
당연히 본선의 브리지를 지나치어 6번 창에 내려 줄 것으로 기대하고 현장의 대기 상황을 체크했다.
그런데 좌현 윙 브리지 위에 나타난 헬기는 지나쳐 6번 창쪽으로 가지 않고, 본선과 천천히 속력을 맞춰 주면서 그대로 윈치의 호이스팅 라인을 내려 준다.
본선을 떠나려 준비하고 있던 도선사도 좌현 윙 브리지로 나가서 내려진 그 줄의 끝에 달린 고리에 자신의 몸을 걸어 주면서 손을 흔들어 호이스팅 신호를 보낸다.
호이스팅 와이어가 감아 돌면서 파이로트는 하늘로 끌어올려지는 묘기의 주인공이 되어서 본선을 떠난다. 보통 하선한다는 말로 표현되는 배를 떠나는 일이 끝난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예기치 못했던 해프닝은 엄밀히 말한다면 하선(下船)이지만 그래도 들어 올려져 배를 떠난 것이니 옛날 아이들 동화 속의 동아줄 타고 하는 나라로 올라간 아이들 이야기를 경험한듯한 착각을 한참 동안 주고 있었다.
얼떨결에 그렇게 떠나보냈지만, 어딘가 안전수칙을 도외시한듯한 이들의 이런 행동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는 건 아닐까? 은근히 걱정이 되었지만 더 이상 그 생각에 파묻힐 수 없도록 긴박한 상황이 다가와 있다.
직접 조선을 해서 파도가 한 번씩 밀려들어오는 외항의 입구 방파제 끝단을 오른쪽에 두며 조심스레 빠져나가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주위를 살피며 기관과 조타 명령을 내려준다.
-풀 어헤드 엔진.
-현 침로대로 스테디.
3항사는 엔진을 풀 어헤드로 하기 위해 텔레그라프를 돌려주고, 조타사는 현재의 침로대로 정침 하려고 타륜을 잡은 손에 힘을 가해 정침을 한 후 복창을 한다.
-엔진 풀 어헤드 써.
-스테디 XXX도 써.
외항의 구불거리는 파도를 충분히 헤쳐 나갈 수 있는 형편이 된 본선이 늠름한 모습으로 방파제를 빠져나와 드디어 장기 항해에 나서는 길로 들어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