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동승 환경에는 좀 나빠진 형편이지만.
도착 예정을 잘 맞춘 항해로서 화물 양하 항의 외항에 접근되어 갈 무렵,
겨울바다 같지 않게 잔잔한 수면을 갖춘 포근한 항구가 기다리고 있는 바람직한 분위기였건만, 마음은 약간의 갈등마저 느끼며 씁쓸한 입맛을 다셔야 하는 소식으로 잠깐 멈칫한다.
배가 한참 항계로 접근하는 신경 쓰이는 시간이라, 계속 브리지에 머무르고 있던 중에, 통신실의 인마셋트 전화벨 소리를 듣게 되었다. 외국에서 온 전화일까? 궁금함 마음도 가지며 수화기를 들었다. 예상과 달리 국내 그것도 본사 영업부에서 온 전화였다.
이번 항차 포항에서 화물인 석탄 부려주는 일을 끝낸 후, 차 항차 선적을 위해 찾아갈 기항지 항구가 지금까지 예정했던 곳이 아닌 다른 항구로 바뀌었다는 통보였다. 지금 형편으론 나중 접안이 끝난 후 지점을 통하거나 국내 기항 시 쓰는 선내 전화로 연락을 주어도 되는 건데 이렇게 서둘러 알려 온 이유가 좀 아리송해 보인다.
어쨌거나 전화받기 전까지는 호주 뉴사우스 웨일스 주의 뉴캐슬로 잡혀 있던 목적항이 전화를 받는 순간 바꿔진 것으로, 나라는 같은 호주이지만 퀸즈랜드 주의 항구로 바뀐 것이다.
바닷가에서부터 외해에다 부두를 만들만한 적당한 수심을 가진 곳까지 길게 말뚝을 박아 놓은 후, 그 위로 자동차 길과 컨베이어 벨트 라인을 만들어 주고, 그 끝에 접안 설비를 갖춘 부두를 건설하여, 배를 받아주는 그야말로 한적한 시골 마을인 퀸즈랜드의 헤이 포인트(HAY POINT)로 목적지가 변경되었다는 언짢은(?) 통보가 전달된 것이다.
언짢게 느껴지는 마음은 내 개인적인 가족 동승으로 호주 기항 중 그래도 제일 관광할만한 곳인 시드니를 볼 수 있는 뉴캐슬 항구를 취소시키고 그야말로 한적하고 볼품없는 항구로 바뀌어준 소식 때문이다.
어쩌면, 이번 항차 아내의 동승 신청을 한 것 중, 제일 큰 이유로 부각되었던 게, 뉴캐슬항의 기항이라 여겨지는 데, 전화 한 통화로 그 기대가 무산되다니, 못내 아쉬운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절대적으로 관광하려는 목적만으로 동승 신청한 것은 아니니, 내친김에 계획했던 동승만은 계속하기로 작정한다. 속으로 기대하고 있던 상황이 무너진 섭섭함에 쯥쯥 맨 입맛을 좀 다시기는 했지만.....
차 항차에 기항 예정인 헤이 포인트는, 나 역시 지금껏 수도 없이 다녀 본 곳이지만, 아직까지 상륙을 한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곳이다.
그 앞 동네에 나가봐야 구경거리도 쉴 곳도 없이, 석탄이나 잔뜩 재어놓은 저탄장과 그에 따른 석탄을 받고 보내는 설비들이 얼기설기 오고 가는 을씨년스러운 곳 임을 매번 입항했을 때마다 쌍안경으로 확인하면서 아예 상륙을 포기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내의 입장에선, 아무리 동승이긴 해도 명색이 외국 여행을 다녀오는데, 아는 친지들에게 줄 자그마한 선물이나, 그림엽서라도 구입할 수 없는 그런 한적한 곳이라고 알려 준다면 곤혹스러워할 게 분명하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그곳 헤이 포인트의 기항 시에는 포기하고 있었던 상륙을, 이번에 기항해서는 꼭 실시하리라 작정하며 전화를 끊었던 것이다.
사실 선원들에게는 장기 항해를 끝내고 항구에 입항하면, <재충전을 위한 휴식>이란 대명제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라도, 육지의 공기를 마셔보는 상륙은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헤이 포인트에 기항하면서, 선원들 상륙을 실시 안 한 것은, 상륙의 의미가 별로 커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상륙을 위한 경비를 쓰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나 대로의 생각과 판단으로 결정했던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그곳으로의 기항 기간이 크게 장기 항해도 아닌 상황이라, 구태여 많은 경비를 들이면서 까지 상륙을 하는 것은 회사 이익 창출에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렇게까지 회사 이익에 앞장서듯 나서며, 선원들의 복지 쪽을 조금은 무시(?)했던 -나-라는 사람은 과연 어떤 그룹에 속하는 뱃사람인가? 선주 편일까? 선원 편일까?
선주의 대리인으로 선내의 모든 일을 처리하는 입장이라는 게 공적인 선장의 위치이기에, 선원 노조에서도 선장은 선원노조 조합원으로 받아주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선주가 끝까지 자신의 대리인으로 여기고 대우해 주는 것이라 보기에는 어딘가 어정쩡한 낌새를 갖게 만드는 개인으로, 노조 가입도 안 되어 있는 묘한 위치의 선원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그 계통으로 한 가지 짚어둘 만한 이야기가 있다. 호주에서는 선원노조가 각 직급별로 구분된 노조로 되어 있어 선장 직책의 모임인 <선장 노조>도 따로 있다는 소문이다.
그것은 선장을 선주 대리인에 더하여 <해기 노동자>로도 대우한다는 뜻이니, 선장들에게 확실한 이해관계를 회사와 따질 수 있는 단체적인 뒷배경이 되어준다고 여길수 있는 항목이다.
어쨌거나 다음 항차에는 동승하는 가족을 위하고, 선원도 위하는 방향을 우선으로 생각하여 상륙을 꼭 실시해 보리란 작정을 해본다. 상륙지로는 본선이 헤이 포인트 부두에 접안을 할 때면 미리 나타나서 기다리고 있다가도와주는 터그보트들이 소속되어 있는 선적항인 맥케이항이다.
헤이 포인트에서 승용차로 약 두 시간 정도 달려가면 있는 이웃 소 도시인 맥케이까지 왕복하는 통차만 낸다면, 그곳으로의 상륙은 가능할 거란 생각을 떠 올리며 더 이상의 생각은 현장에 갔을 때 확실히 결정하기로 하면서 접어 두기로 한다.
그동안 당장 필요하고 급한 일이 닥쳐와 있다. 1230시. 본선을 도착 즉시 부두에 접안시키려고 도선사가 승선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