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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달 그믐날의 영일만

동생네 가족과 함께 맞아 한 그믐날.

by 전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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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중 가장 분주한 모임 역시 가는 해가 아쉽고 오는 해가 기대되는 섣달그믐 날이다.

집에 있었어도, 집에 있을 수 없는 바쁜 마음 때문에, 시내 어디를 헤매고 다녔을지도 모르지만, 입항한 배 안에서 맞이하는 오늘은 텔레비전이나 시청하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가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는 게 고작이다.

이런저런 떠도는 이야기들은 모두가 새 천년, 밀레니엄, 21세기 하는 말들과 함께 온 나라가, 아니 온 지구촌이 떠들썩한 분주함 속에 저마다 빠져 들겠다고 아우성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들게 만들고 있다.


어느 챤넬로 돌려줘도, 비슷비슷한 그런 말들과 함께 지난 100년을, 아니 천 년을 되돌아보는 프로그램을 경쟁적으로 방영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국가 지정으로 이곳 호미곶(虎尾串)에서 새 세기를 여는 날의 해맞이 축하 행사가 내일 벌어진다고 하여, 전국에서 그 구경을 하려고 찾아오는 사람들로 이곳 포항과 구룡포의 교통이 무척 막힐 것이란 이야기가 돌고 있다.


동생네 세 식구가 아내를 자기네 승용차에 태우고 함께 나를 찾아온 것도 그런 관광객 중의 한 가족으로 덧붙여줘도 되리라.

동생과 제수 그리고 조카까지 끼인 세 사람은 어젯밤을 그렇게 해서 배에서 지냈다.

나는 아내를 데려다준 일에 대해 보답이라도 해주려는 기분으로, 배 위에서 해 뜨는 구경을 하자며 새벽 일출 전부터 서둘러 그들이 자고 있는 방으로 전화를 걸어 브리지로 불러 올렸다.


아내와 동생네 세 식구 모두가 브리지 윙 사이드 갑판에 모였다. 그리고 점점 밝아 오는 바다 쪽을 둘러싸고 있는 산의 거무스레한 윤곽을 쳐다보다가, 새벽 한기에 절로 몸을 떨어 사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반도(韓半島) 호랑이 꼬리뼈쯤 되는 걸로 보면 될까? 영일만을 둘러싸고 있는 산 위로 붉으스레 밝아 오는 여명 속에서, 방금 동그란 얼굴을 내밀어 떠 오르는 해가 보인다.


내일이면 2000년 새해가 되어 떠오를 해님의 솟아오름을 예행연습하듯이 미리 구경하자고 그들의 솔깃함을 한껏 끌어올려 청한 내 의도대로 떠 오르는 해는 봤지만, 정확하게는 이미 수평선 위로 떠 올라 있었지만, 그 모습을 가려줬던 산을 재차 넘어서 찾아온 모습이다.


어제 아내를 데리고 배를 찾아왔을 때, 동생네 세 식구를 위한 잠자리가 마땅치 않았지만, 그들에게 일반 관광객과는 다른 경험을 주기 위해서도, 배 안에서 재우기로 작정했고 그들도 당연히 내 생각을 따라 주었다.


마침 통신장이 집에 다녀온다면서 비워지는 자신의 방을 사용하라는 이야기를 해 주어 여분의 침구로 깨끗이 바꿔주어 지난밤을 지내게 했는데, 밤에 좀 추웠단다.


그 방의 천정 위가 바로 윙 브리지 갑판이 되므로, 대기에 그냥 노출되는 상황인 것을, 잠깐 간과했던 거다.

초저녁에는 덥다고 에어컨디셔너 온풍을 모두 잠가준 채 새벽을 맞게 했던 것이 추위를 불러들인 원인이 된 것이다.


아침 식사 후에 시내에 나갔다 들어온 동생네는 이곳 포철에 근무하는 옛 친구와 연락이 닿았다며 오랜만에 만나는 회포를 친구 집에서 풀겠다며, 해상호텔 같은 배에서의 숙박을 더 하지 않겠단다.


아마도 배 안에서 하루를 더 지내도 불편함 없이 잘 대해 주는 환경은 알지만, 큰형 네와 같이 있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점이 되었으리라. 그래서 동생 네는 오랜만에 만나게 된 모든 게 만만한 옛 친구와 섣달 그믐날의 회포를 푸는 쪽으로 결정을 한 것이리라.


그런 점들을 이해하기로 하여, 동생네와 같이 마시려고 준비하고 있던 양주를 들려주면서 잠깐이나마 섭섭했던 마음을 풀어버리고 동생네와 그 친구를 배웅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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