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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초하루의 호미(虎尾)곶

인파로 호미곶 방문을 포기하다.

by 전희태


SNB10056.JPG 호미곶 이야기를 하며 호미곶 사진 한 장 못 찍었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밀레니엄 버그가 시작된다고 경고받고 있는 해. 내방 컴퓨터에

서 Y2K 환난은 발생되지 않은 채, 새 천 년을 맞이하고 있어 한시름 놓았다.


구룡포가 고향인 기관장이 호미 곶에 직접 찾아가 보자는 안내를 따라 우리 부부는 기관장 부부와 함께 기관장이 운전하는 승용차에 올랐다. 점심 식사도 할 겸, 새벽 나절 구름에 가리고 비로 인해 못 보게 되었던, 초하루 일출의 아쉬움도 달래 보려는, 드라이브를 겸한 나들이였다.


호미곶은 예전에는 토끼 꼬리라고 지칭하기도 했지만, 이는 일제가 우리의 기상을 뭉개기 위한 교육의 잔재로 서의 표현이므로 이를 바로 잡아 한반도를 토끼가 아닌 웅크린 호랑이로 표현하였을 때 바로 그 부분이 호랑이 꼬리-호미(虎尾)-가 되는 곳이다.


구룡포 까지는 그런대로 차의 빠짐이 원활했는데, 구룡포 읍내를 지나고 호미 곶에 점점 가까워지면서부터 밀리기 시작하든 차의 행렬이 급기야는 도로를 주차장 같이 만들고 있다.

하늘도 점점 짙게 흐려지더니, 오히려 새벽보다 더 빗줄기도 뿌려주고 있어, 도로와 길가의 대지마저 촉촉하니 젖어들고 있다. 어쩌면 새 천년 초하루의 시작을 희망의 햇빛으로 맞는 것보다는, 대지를 풍요롭게 적셔주는 일로 시작함이 뜻이 있다고 이야기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다.


느긋하니 자라야 하는 모든 삶이, 몸 붙이는 터전에 충분한 수분을 공급함이 제일 먼저 할 일이라고 일깨워 주면서, 오직 태양만을 우러러 맞이하려는 인파들의 얄팍한 속내를 비웃어주리라 큰 맘먹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계속 호미 곶을 향해 가건만, 밀리는 차량의 행렬로 가다 서다를 반복하니 어느새 느긋했던 우리들의 마음도 초조로 바뀌고, 평소 가지고 있든 규칙적인 식사시간조차 넘기게 되니, 먹을 것이 안 들어온다고 요동치는 위장이 짜증을 은근히 부풀리기 시작한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도착을 위해 그냥 앞차만을 따라간다는 일이, 너무나 아까운 육지에서의 시간 낭비라 생각하고 있는 데, 운전대를 잡았던 기관장이 양해를 구하더니, 그대로 완전한 180도 U턴으로 오던 길로 되돌려 가기를 시도한다.


온 세상을 잿빛의 음울한 색깔로 칠해 놓은 속을, 빗줄기 역시 점점 더 굵어져 가건만, 호미 곶을 향한 차량의 행렬은 끊이지 않고 마냥 이어지고 있다.

가던 차를 뒤로 돌려세워 빠져나온 일은, 위장을 위해서도 잘한 일이라고 은근히 환영하며, 눈에 뜨이는 음식점의 간판들을 읽어내기 시작한다.


네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여 길가에 있는 어느 음식점으로 들어서려고 핸들을 돌리려는데, 앞에 가던 한 대와 뒤쫓아 오던 두 대 합쳐서 넉 대의 차가 같은 코스를 밟아 길옆으로 빠진다.

나란히 마치 일행을 이룬 팀들처럼 차들은 같은 집 주차장에 들어서는 것이다. 이 순간만큼은 그 넉 대의 차에 타고 있든 사람들의 정서가 똑같이 일치할 만큼 뱃속이 출출하였던 모양이다.

어제부터 몰리기 시작한 관광객들의 인파로, 음식점은 준비된 음식재료도 이미 바닥에 가까워진 모양이나, 손님 받는 것에는 계속 욕심을 부리고 있어 보인다.


길거리에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관광객들이 짜증도 벗어날 겸 점심식사를 하려고 차를 몰고 찾아오면 그들 모두를 그대로 맞아들이고 있었다.

무조건 이층으로 올라가라는 주인의 말에 줄을 서듯 앞서 들어선 차에서 내렸던 사람들을 따라서 올라간다.

우리 네 사람이 그들과는 다른 일행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후에는,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가라는 번잡스러움을 거쳐 겨우 창가에 있는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날씨야 생선회를 먹기에는 부적합한 비 오는 날이지만, 그래도 벼르고 찾아온 기회이니 네 사람이 먹을 만큼의 생선 모둠회를 시키고 그에 부수된 매운탕을 곁들인 식사를 청한다.

종업원이 찾아와 제대로 된 대접을 못하게 되어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하며 다음에 오면 이번에 대접이 모자랐던 부분까지 보충해서 잘 대접하겠다고 너스레 치는 말을 들으며,


-저희는 구룡포 사람입니다. 진짜로 한 번 더 올 거예요!

기관장이 어쨌건 잘 해보라는 압력 행사로 고향을 들먹여 가며 응수한다.


작은 접시에 담긴 회를 받아 놓으며 처음엔 적은 양인 듯 느꼈는 데, 무채를 썰어 방석같이 깔아 놓은 큰 접시가 아니고, 순전히 회만 담아온 것이어서 생각보다 먹을 만큼의 양은 충분히 되었다.


은근히 걱정했던, 일반 관광지에서 자주 경험하든 눈살 찌푸리는 바가지 쓴 것 같은 기분은 면하게 되어 그나마 다행이라 여기며, 매운탕까지 받아들여 본격적인 식사에 들어서는데, 어느새 비도 슬슬 줄 긋기를 멈추어 가기에 오후로 들어서면서 날씨가 맑아질 희망을 남겨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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