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해 중에 만난 배들

눈에 보이는 항로선은 없지만 만남이 잦은 길목은 있다.

by 전희태
B11(9381)1.jpg 우리 배를 따라잡아 앞서 가는 배



한진 리차드베이호.

신조하여 나온 지 약 2 년 반쯤 된 배로서 재작년 내가 오션 마스터호를 탔을 때에도 우연히 이 부근에서 만났는데, 그때는 지금과 반대로 같이 호주 쪽으로 내려가던 길이었다.


당시에는 같은 신조선으로서 우리 배가 따라잡는 신나는 기억을 안겨 주었던 배였는데, 오늘은 내가 탄 배가 따라 잡히는 추월을 당하고 있다.


새벽녘, 파푸아 뉴기니아 섬의 동쪽 끝 VITIAZ 해협에 들어설 무렵, 우리 배의 꼬리에 붙어서 따라 내기를 시작하더니 아침이 밝아 오면서 어느새 왼쪽 옆을 지나쳐 앞서가기 시작한 것이다.


좁은 해역을 항해 중 만나게 되는 선박 간에 추월이란 행동이 있게 될 경우, 추월하려는 선박은 피 추월선의 동의를 얻어 추월을 해야 한다.


이때 피 추월선은 그 추월 상황을 인지하고 상대의 의도대로 동의를 해준 후에는, 침로 및 속력 유지를 해주어 안전하게 그 추월 상황이 완수될 수 있게 도와줘야 할 의무를 가지게 된다.


아무래도 골목길 같이 좁은 곳이라서 VHF 전화로 서로의 상황을 이야기하여 추월을 어느 쪽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에 합의해주어 혹시 발생할지 모르는 추돌이나 충돌을 방지하려는 대비이다.


예전에 알류샨 열도의 끝자락 길목인 유니막 수로 부근에서 이런 일도 있었다.


서로 지나쳐야 하는 만남을 가진 양선의 당직사관들이 학교 때의 동기생이란 점을 알고는 서로 만나 반갑다고 인사하며 너무 반가움에 파묻혀 가까이 접근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우물쭈물하다가 그만 충돌을 한 경우이다.


이 때도 서로 지나치는 방향을 정하여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의무를 너무 소홀히 하며 반갑다는 인사에만 파묻혀 당직을 소홀히 한 때문에 생긴 충돌사고였다.


당직 사관들이 타선을 자신의 선수 쪽에서 상대선의 선수를 마주 보며 만나게 될 경우는 서로 반대방향으로 지나쳐야 하는 경우이고, 상대 선의 선미를 본선 선수에서 보는 경우는 본선이 따라잡게 되는 추월의 경우가 되는데, 그런 추월 동작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면, 추월하려는 의도를 상대에게 알려주도록 하고, 상대의 인지나 허락을 받게 되었을 때 공식적으로 추월은 시작되고, 이때 피추 월 선도 양선의 행동에 따른 의무를 충실히 지켜줘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다.


지금이 그런 와중이지만, 추월선인 한진 리차드베이호의 관계 당직자들은 어쨌든 남을 따라잡는다는 경쟁 심리로 볼 때에 아주 기분 좋은 일로서 이 추월을 즐기고 있겠지만, 본의 아니게 피추월을 당하고 있는 우리 배의 당직자들-특히 본선 선장인 나는- 그 반대의 입장이니 썩 기분 좋았던 일만은 아니다.


단지 아무렇지도 않은 양 시치미를 떼보는 것으로 애써 무관하고 제 아닌 척하면서 추월의 행위가 어서 안전하게 끝나서 이런 마음고생(?)에서 빨리 벗어나기만을 바라는 심정으로 있다.

그러면서 세상사의 오묘한 섭리가 오늘의 이일 안에도 있어 그를 배운다고 여기기로 작정해보는 것이다.


사실 예전에 내가 그 배를 따라잡으면서 즐겼던 그 마음을 바로 오늘 이 시간에는 그 배로 다시 되돌려 주는 일로 진행된 셈이니, 어쩌면 공평한 신의 섭리가 이런 게 아닐까?


그런 식으로 이해하기로 마음먹으니, 아등바등 뒤에 처지게 되었다고 기분 나빠할 일도 아니오, 앞서 빨리 나간다고 흥분하여 뽐낼 일도 아니라는 세상사의 흐름을 순리로 수용하는 덕목을 깨닫게 되었다고 적고 싶은 것이다.


VITIAZ해협을 거의 다 빠져나올 때쯤 앞에서 남하하고 있는, 서로 마주 보면서 지나치게 된 현대 상선의 현대 아트라스호를 만나 몇 마디 통화를 하는데, 그 뒤로도 아직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줄줄이 나타나고 있는 배들 중에는 반가운 우리 회사의 자매선인 오션 팍호 당직사관의 목소리도 VHF 전화로 참여하고 있다.


오션 팍 호란 배가 태어 날 무렵. 현재 우리 배도 다른 회사의 배로 만들어졌지만, 배 크기도 똑같고 그야말로 같은 조선소에서 몇 달 차이를 두고 만들어진 거의 같은 도면의 자매선으로 태어났던 것이다.


그 후 시간이 지나면서 해운회사들의 통폐합이란 사건이 생기면서, 결국 우리 회사의 자매선으로 새롭게 인연이 맺어졌던 것이다.


내가 본선 대우 스피리트호를 타기 전에 원래는 오션팍호의 책임 선장으로 승선하려고 했었으나 DS호 선장의 피치 못할 하선 사정으로 조기 교대하게 되어 그냥 굳어진 것인데 현재 그 배 선장이 바로 내가 교대해주어 책임 선장의 직책을 서로 배를 바꾸어 가지게 한 바로 그 A 선장이다.


A 선장을 불러내어 안부의 이야기를 나누고 안전항해를 빌어주며 통화를 끝내었는데 또 몇 시간이 지난 후에는 우리 배가 헤이 포인트를 떠날 때 다림 풀 베이에 접안하여 작업 중이던 팬 아이린호가 홍콩을 가기 위해 열심히 쫓아와 멀리 추월하여 왼쪽의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 버린다.


이렇게 우리 배를 따라잡아 앞서 가는 배, 앞에서 우리와 서로 마주치어 지나가는 배들로 한나절을 바쁘게 보낸 곳인 이곳 VITIAZ 해역은 배들이 모일 수밖에 없는 좁은 병목 현상을 갖고 있는 곳이다.


아직 적도를 통과하지는 않았지만 휴일인 오늘을 이용하여 브리지와 기관실에서 적도제를 지내며, 오늘 모습을 보여준 배들의 안전 항해도 함께 빌어 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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