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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내 시간의 전후진

기분 좋은 시간을 늘리는 방법

by 전희태
B303(6105)1.jpg 비가 지나고 난 후 나타난 무지개의 모습


적도를 통과할 무렵 필리핀 동쪽에 생겨난 1006 hpa의 저기압이 꼼지락거리며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슬며시 열대성 저기압으로 변해 가는 것을 기상도 상에서 확인하며 은근히 앞길을 걱정하며 부지런히 관찰을 끊지 못하고 있었다.


그랬던 녀석인데 필리핀을 완전히 넘어서서 남지나해로 들어서더니 그냥 저기압으로 되돌아가 중부 월남을 향해 가는 모습을 보인다.


마치 필리핀을 가로로 지나치면서 없던 힘마저 모두 소진해서 열대성 저기압에서 그냥 저기압으로 물러 앉은 것이 금방이라도 수리가 필요해진 힘 빠진 배를 보는 느낌이다.


-비나신을 향하려는가?

그래서 그런 우스갯소리를 하며 한시름 놓았다. 비나신은 얼마 전 우리 배의 수리를 위해 찾았던 수리선 드라이 독이 있는 베트남의 항구이다.


날씨마저 다정다감한 이웃 인양 흠잡을 데 없이 고즈넉한 모습으로 우리를 대해주니 모처럼 펼치고 있는 주말 선상 파티의 분위기를 도와주고 있다.


뜨거운 불판 위를 닮음 직한 한 낮 갑판 위의 시간이야 지났지만, 그래도 남아있던 열기 위에 구름이 적당히 드리워 그늘을 만들어 주니, 방금 피어 준 이글거리는 진짜 화덕 불판을 마주하여 양념에 재운 갈비를 굽는 것이 그냥 재미가 되어 모두들 뜨거운 줄도 모르고 희희낙락 거리고 있다.


어느새 세찬 소나기라도 퍼부어 주렸는지 뿌옇게 흐려진 모습의 비구름이 수평선과 맞닿은 광경으로 다가오는데 묘하게도 우리 배를 살짝 피한 저쪽으로 치우쳐 지나가고 있다.


비가 몰고 다니는 산뜻한 시원함은 맛 보여 주면서도, 직접 비와 바람으로 인해 회식의 장소가 망가지는 낭패는 남기지 않은 채, 오히려 멋진 무지개마저 선물하며 지나가는 것이다.


-봐라, 우리를 위해 비도 저렇게 피해서 가며 무지개까지 선물하잖니?

그 기쁨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큰 소리로 지나가는 비와 무지개를 보라고 소리를 쳐본다.


-사진을 찍어야죠.

하며 누군가 부리나케 카메라를 가지러 자기 방으로 뛰어간다.


-어이! 모두들 기분이 좋지? 이렇게 좋은 날의 시간을 늘리기 위해 오늘 한 시간 후진을 하기로 했지.

호주로 내려가며 전진해 두었던 한 시간을 다시 우리나라의 시간에 맞추기 위해 돌려주는 일을 오늘 하기로 한 것이다.


기왕에 후진시켜 되돌려 주어야 하는, 한 시간이라면 기분 좋은 날에 덧붙이는 것이 그만큼 즐거운 시간을 더 갖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오늘 시행시키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시간에 항해 당직을 서야 하는 3항사에겐 남들이 즐기는 시간을 위해 한 시간만큼 당직을 더 서야 하는 일이 생긴 셈이다.

모든 사람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늘어난 시간을 즐기게 된 광경을 잠깐 식사 교대하러 내려와서 보게 된 삼항사는, 속으로야 어떻든 오늘의 파티를 그도 즐기는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물론 지난번 호주로 내려갈 때에 전진해야 하는 한 시간을 그의 당직 시간에 이미 마친 일이 있으니, 오늘의 한 시간 더 서는 당직은 산술적으론 공평한 일이기는 하다.


-삼항사, 나중에 내가 좀 교대해 줄게 그때 내려와서 노래도 몇 곡 부르고 즐기도록 해라.

-선장님! 괜찮습니다.

대답은 그렇게 하지만, 선장이 자신을 배려해주고 있다는 사실에, 3항사의 마음은 조금이라도 흐뭇해졌으리라 믿어보는 경험을 나는 가지고 있다.


예전 3 항사 시절, 방콕에서 정박 중이던 어느 날 저녁때였다.

땀을 뻘뻘 흘리며 당직사관으로서 하역작업을 독려하고 있던 나를 보고, 일부러 갑판으로 찾아와서 수고한다고 등을 두드려 주시던 선장님의 자상했던 모습에 고맙고 흐뭇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나도 그런 여유를 가지고 부하를 다루는 기술(?)을 그때 배웠던 것일까? 이미 30 년 넘어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 추억을 되짚어 보는 입가에 가만한 한숨과 미소가 절로 스미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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