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라한 인연의 빛바래진 사진을 보며
한바다 연수원 앵카 탑이 있는 본관 앞모습.(한바다 연수원 포토 갤러리에서 퍼옴)
아직 깜깜한 산속의 새벽이다. 승선 중의 버릇대로 일찍 잠에서 깨었다.
같은 방을 쓰게 된 두 사람 쪽을 살펴보니, 한 사람은 아직 잠이 깊이 들어 있는데, 김 선장의 침대 쪽은 좀 전에 나던 부스럭대던 소리가 그친 걸 보니 어느새 밖으로 나간 모양이다.
나도 주섬주섬 그러나 조심스럽게 옷을 주어 입고 방문 앞에 도착했다. 갑자기 환하게 불빛이 켜진다. 자동으로 켜지고 꺼지는 도어 안 감지등이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자고 있는 사람을 생각하여 얼른 불빛이 꺼지라고 신발도 제대로 꿰지 못한 채 급하게 방문을 나선다.
이번에는 어두운 복도를 걸어야 하는 발소리가 커지는 것 같아, 다른 방의 잠든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조심스레 발걸음을 내딛는다.
얼른 복도 끝에 있는 휴게장소인 흡연장의 의자를 향해 발소리를 조심하며 찾아 앉은 후, 신발을 찬찬히 제대로 신고, 끈도 당겨 매 준 후, 아래층을 향한 나선형의 계단을 내려간다.
이미 담배를 끊은 나와는 상관없는 흡연 허가 장소이니 빨리 떠나자는 마음이 바쁘게 작용한 때문이다.
계단을 다 내려섰다. 비상등에 의해 어슴푸레 하니 비치는 어둠 속에서 연수원의 현관이 웅크린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얼른 그 앞 가운데에 서니 자동문이 저절로 열린다. 다행히 문을 폐쇄하지 않고 있었던가, 아니면 일찍 일어나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연수원 당직자가 미리 열어 두었던 모양이다.
밀치는 문을 하나 더 열고 밖으로 나서니, 싸늘하게 식어 있는 대기가 어둠과 함께 확 달려들며 깜깜한 속에서 반겨 준다. 잠시 눈을 어둠에 익혀가며 몇 걸음을 옮겨, 앞에 놓인 계단의 층수를 조심스레 세면서 내려선다.
모두 일곱 개의 계단인데 마지막 계단은 높이가 좀 낮게 수정되어 있다. 흠칫 내려서던 발이 약간의 비틀거려져 넘어질 뻔 한 몸을 얼른 바로 세운다.
회사가 폐선시킨 어느 사선(배 이름은 잊었음)에서 떼어 다 탑 같이 조형물로 세워 놓은 닻이 현관 앞 작은 광장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여기는 좁아서 운동하기에는 마땅치 않고, 더군다나 침실의 앞마당도 되니 소리를 낼 수도 없어 위쪽에 있는 주차장으로 향한다.
넓은 주차장에는 두 대의 차량이 산골의 서리를 맞아 희끗거리는 색깔을 머금고 웅크리고 있다. 주차장 분할 표시로 길게 줄 처진 흰 페인트의 경계선을 따라 걸음을 옮기는데, 힐끗하니 인기척을 내는 그림자가 저 앞에서 나를 기다리듯 서 있다.
-여! 김 선장이세요?
-아, 전 선장도 일찍 일어나네요?
시인 선장이 말을 받으며 천천히 다가선다.
그렇게 이 새벽의 호젓한 침실 밖의 만남에서 김 선장은 임파선 암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였다. 나는 그때까지 그가 그 병에 걸려 투병 중이란 것을 몰랐다가 그 자리에서 알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뱃사람들의 가깝고도 먼 만남의 인연이란 게 그런 것이기에, 그제야 서로 학교를 떠난 후 거의 처음 재회한 것임을 사실로 확인하며 한숨 돌리었던 것이다.
-아, 평생 데리고 살 생각으로 살살 달래 가며 생활하면 될 거예요.
투병 중인 그의 힘을 북돋우는 이야기를 그렇게 해주면서, 우리 집안의 중요한 두 사람인 큰애와 아내가 각각 뇌종양과 대장암으로 방사선 치료와 수술을 받고도 지금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투병 성공담을 들려주면서 그가 용기를 갖고 암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은 내 마음을 펴보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그닐 아침 이후 연수원에서 일주일을 더 보낸 후 우리는 헤어져 각자의 집으로 갔고, 남아있던 연가를 모두 지내고 각자의 배로 다시 돌아갔는데, 그 날이 시인 선장과의 이생에서의 마지막 인연의 며칠이었다는 걸 그때에는 알 수 없던 일이다.
선장 시인의 데뷔를 이룬 대표작인 <청진항>을 가만히 음송하며 그와의 인연을 다시금 기려 본다.
詩 : 청진항
김성식
배를 타다 싫증나면
까짓것
청진항 도선사가 되는거야
오오츠크해에서 밀려나온
아침 해류와
동지나해에서 기어온
저녁 해류를
손끝으로 만져가며
회색의 새벽이
밀물에 씻겨 가기 전
큰 배를
몰고 들어갈 때
신포 차호로 내려가는
명태잡이 배를 피해
나진 웅기로 올라가는 석탄 배를 피해
여수 울산에서 실어 나르는
기름 배를 피해
멋지게 배를 끌어다
중앙 부두에
계류해 놓는거야
청진만의 물이 무척 차고 곱단다
겨울날
감자떡을 들고 갯가에 나가노라면
싱싱한 바다냄새
더불어
정어리 떼들 하얗게 숨쉬는 소리
엄마 가슴에 한아름 안기지만
이따금 들어오는 쇠배를 보느라고
추운 줄 모르고 서 있었단다
잘 익은 능금 한 덩이
기폭에 던져놓고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별을
기폭에 따다 넣고
햇살로 머리 빗긴
무지개를 꺾어 달고
오고 가는 배들이
저마다 메인 마스트에
태극기 태극기를
올 엔진 스탠바이
훠 샷클 인 워터
렛고우 스타보드 엥커
방파제 넘어
닻을 떨어 뜨려
나를 기다리면
얼른 찾아가
나는
굿 모닝! 캡틴
새벽별이 지워지기 전
율리시즈의 항로를 접고서
에게해를 넘어온 항해사
태풍 속을 헤쳐 온 키잡이
카리브해를 빠져 온 세일러를 붙잡고
주모가 따라주는 텁텁한 막걸리
한 사발을 건네면서
여기 청진항이 어떠냐고
은근히 묻노라면
내 지나온 뱃길을 더듬는 맛
또한
희한하겠지
까짓것
배를 타다 싫증 나면
청진항 파이롯이 되는거야 .
-197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작품 -
1962년 해양대학 2학년 여름 방학 때였다. 우리들은 모처럼 시간을 내어 경기도 입석의 어느 개울가 논에다 간이 텐트를 치고 캠핑을 하면서 시장에서 사가지고 간 살아있는 미꾸라지 미끼를 메운 간이 낚싯대를 밤새도록 드리웠다가 새벽녘에 낚인 한 마리의 뱀장어의 모습에 같이 환호 작약했던 김시인과 또 다른 한 명의 학우와의 시간이 이제는 낡아서 빛바랜 사진이 되었건만 아직도 내 뇌리에는 선명히 찍혀있는 그리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