옅은 유막이 주는 불안감
닻을 놓은 다음 날부터 갑판부는 부분적이지만 열심히 갑판 위로 솟아나려는 녹을 찾아 두드려내어서 녹을 떨어내었고, 그위에 칠하기 시작한 방청도료(페인트)를 몇 겹으로 두텁게 하여, 녹이 또 나오는 걸 방지하는 정비를 끝냈었다.
이제 마지막 원색의 칠을 하려는데 오늘의 날씨는 <페인트 칠하기에는 아니 옵니다.>가 제격인 흐린 날씨다.
하루 종일 해의 얼굴을 가린 두터운 구름이 하늘에 높게 깔려있어 회색빛의 음울한 모습을 보이더니 저녁 식사를 끝낼 무렵이 되니 결국 일을 내어 퍼붓듯이 쏟아지는 빗줄기로 금세 옆에 정박해 있던 배도 보이지 않게 만들어 준다.
마지막 페인트를 칠해 놓은 지 한 시간 30분 정도가 지난 시간에 오기 시작했기에 페인트는 어느 정도 마른 상태이라 다행이라 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좀 두텁게 칠해진 곳은 덜 마른 부위가 벗겨지는 일도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새옹지마의 고사가 보여주듯이 이랬다 저랬다 하며 희비가 엇갈리는 게 인생살이라 하지만, 이렇게 퍼붓는 비를 두고 아주 다행인 일도 생겨났다.
저녁 무렵 페인트 작업을 마감하려던 시간에 일항사는 입항에 대비한 발라스트 조절 관계의 펌프 작업을 하던 중으로 그 작업의 영향으로 배가 오른쪽으로 3.8도 정도 기울어져 있었다.
그때 도장 작업이 이뤄지던 오른쪽 갑판에서는 두 사람이 칠 하고 난 뒤처리로 도료가 묻어 있는 붓 등을 시너에 담가 빨아내는 일을 하던 중 그 통이 넘어지는 일이 생겼다. 안의 내용물이 쏟아져 나왔지만 두 사람 모두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고 무심히 지나치자 평소보다 많이 기울어진 경사로 인해, 붓에 묻어 있다가 시너에 씻긴 페인트가 갑판 상으로 흘러나와 경사진 부위를 따라 선외로 나가는 스커퍼 (SCUPPER)를 통해 그대로 해상으로 흘러 나가는 일이 발생했다.
물 위에 뜬 기름기의 전형적인 모습인 무지갯빛 색깔을 띄운 해면이 오른쪽 외판 부위에서 즉시 확산되는 걸 마침 브리지에 있던 당직자가 보고는 급하게 소리쳤다.
더 이상 흘러 나가지 못하게 스커퍼는 막도록 했고, 물 위의 뜬 무지개에겐 잠시 후 급하게 가지고 나온 퐁퐁이란 중성세제를 뿌려주어 오색 빛이 찬란한 기름띠를 슬며시 흐려져 사라지게 만들었다.
사실 흘러 나간 시너의 양이야 미미한 것이지만 유난히 반짝거리는 색깔이 남들 보기에는 큰 오염사고라도 난 것 같이 여길 수도 있기에 급하게 취한 조치였다. 일종의 눈가림을 위해 중성세제를 한 병 뿌려준 이 일은, 엄밀하게 따져본다면, 어쨌건 세제의 새로운 오염을 불러온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 조금은 떨떠름하다.
붓을 빨고 있던 선원이 시너통이 넘어진 걸 즉시 세워주며 흘러나온 시너를 닦아 주었다면 이런 일들을 안 해도 되는데 하는 마음이 드니, 실수를 저지른 선원에게 신경질을 내며 고함지르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사후 약방문> 같아 그만두었다.
어서 그 유막의 남은 부분마저 사람들 눈에 뜨이지 않게 어두워지기를 바라는 심정이다.
그 심정 알아주었는지, 시간이 빨리 지나가서 보다는, 바람이 구름을 더 끌어와 어둠을 주면서, 한목에 퍼붓는 장대비까지 보태주어 모든 걸 깨끗이 씻어 내주고 간다.
호주 사람들이 그 경치를 자랑하는 태즈메이니아 섬 남쪽 한참 아래를 지나는 저기압이 삐죽이 내밀어 준 전선이 지나가서일까? 아니면 퀸스랜드의 육지 안에 있는 저기압이 확장되어 나오면서 비를 뿌려주어서일까? 어떤 것 때문이라도 우리 배의 난처함을 도와준 이들 기상 상황이 고마울 뿐이다. 아울러 내일은 더욱 좋아질 것으로 기대되는 기상상황을 고대하며 조바심치 던 마음을 접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