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고란 하나같이 모두가 도와줘야

모두의 부추김이 합쳐지면 사고는 발생한다

by 전희태
CE3(7235)1.jpg 뉴캐슬에 입항 하는 모습.


예정은 어디까지나 예정이니 좀 달라져도 크게 할 말이야 없지만, 그래도 접안 예정이라던 날짜의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아무 말 한마디 없는 대리점이 야속하다.

오늘 들어갈 예정이라 했었건만 항만 통제소에서는 아침까지 아무런 말이 없는 걸 보고, 일부러 전화까지 걸어 물어보니 들어갈 예정 없다는 통보만이 퉁명스레 되돌아온다.


기왕지사 접안이 늦어지더라도 날씨나 좋으면 선체 정비 일이라도 하기가 좋으련만 어제저녁 때부터 내리다 말다 되풀이하던 비가 아침이 되어서도 오락가락하며 찌푸린 날씨를 풀지 않고 있어 무슨 일을 해야 하나 고민스러울 지경이다.


창고 정리와 후부 타기 실의 윤활유 새어 나온 것 등을 치우기로 한다는 급조 과업이 오늘 아침 실시할 일로 결정되어 모두들 그에 맞는 TBM(TOOL BOX MEETING)을 실시하고 일하러 가려고 부산한 움직임으로 흩어질 무렵 그 미팅 시간을 깜빡하니 넘기고 있다가 얼핏 생각이 나서 부랴부랴 참석하러 내려갔다.


어제 오후 작업을 마친 후 정리 과정에서 시너가 몇 방울 바다로 흘러 들어간 아차 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꼭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는 생각에 오늘 아침 TBM에 참석하겠다고 벼르던 일이 잠시 다른 일에 몰두하다 시간을 조금 지나쳐 버린 것이다.


제깐에는 부리나케 내려간 셈이었지만 시간은 이미 TOUCH & CALL까지 끝내고 난 후였다. 그래도 어제의 일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어 흩어지려던 사람들을 불러 모아 놓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제 오후 배에서 시너가 조금 바다로 들어가게 된 일은 아차 사고이다.

-모든 사고를 사후에 분석해 보면, 사고 현장에 있던 어느 누구나 한결 같이 그 사고가 나게끔 도와주는 일들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어제의 일에서도 그런 점을 쉽게 찾을 수 있으니 그걸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시너와 페인트 통을 싣고 옮기는 수레를 그냥 놔두면 미끄러져 움직일 수 있는데 붙잡아 매어 놓지를 않고 작업을 했다.


*둘째 당시 발라스트 조정 중이어서 평소와 다르게 배가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여서 쏟아진 시너가 빠르게 흘러내릴 수 있었다.


*셋째 페인트 붓을 빨아준 시너가 담긴 통이 넘어졌는데도 시너이니까 별일 없을 것이라 여기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자신들이 하던 일만 계속했다.


*넷째로 브리지 당직자가 그걸 보고도 무심히 넘겼다.라는 덧붙임으로 끝났다면,

이 네 가지 이유가 똘똘 뭉쳐 사고를 위해 일을 진행시킨 꼴이 되니 붓을 씻어 내느라 페인트로 더럽혀진 시너가 그대로 바다에 들어가 큰 오염사고를 낼 수도 있었다.


하나 다행스럽게도 아차 사고로 마무리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마지막 네 번째 원인의 주인공이 사고를 도와주지 않는 방향으로 일을 처리했기 때문이다.

브리지에서 그 작업 상황을 내려다보고 있던 당직사관인 2항사가 사태의 심각성을 얼른 파악하고 큰소리로 알리어(사고를 도와주지 않는 쪽에 서게 되어) 즉시 스커퍼(SCUPPER)를 막고 바다로 흘러 들어간 몇 방울의 페인트 찌꺼기와 시너도 퐁퐁으로 처리해 큰 오염사고를 막을 수 있었다.


이렇게 조목조목 짚어가며 사고가 나는 유형을 이야기하니까 어디서 쯤 누가 어떻게 하면 그런 사고를 막을 수 있다는 결론을 유추할 수가 있겠다는 점을 눈치챈 분위기이다.


그런 점을 깨우치려고 늦었지만 내려왔다고 하니 개중에 누군가가,

-그럼 선장님 <터치 앤 콜>을 한 번 더 할까요?

한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 두 번 다시 그런 식의 사고가 날 뻔하는 일은 없어야겠죠!

몇 번, 그 점을 강조하고는,

-오늘도 모두 수고하세요.

인사를 보내주며 방으로 돌아왔다.


오후에 들어서며 기다리고 있던 파이로트의 승선이 내일 새벽 5시 30분으로 결정되었다는 통보가 늦었지만 대리점을 통해 연락이 왔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무지갯빛 유막 오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