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의 몇 배 이상 반가왔던 어느 입항일의 이야기.
지난 1월 13일 포항을 떠났다가 오늘 돌아왔으니 한 달 열흘 만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동안 배터리 충전기 안에서 충전만 당하고 있던 휴대폰을 꺼내어 아내의 휴대폰에다 전화를 걸어 본다.
바로 부산항 바깥 바다를 항해하여 지나치면서 걸어 보는 새벽 6시 반의 전화이다.
수화기를 들어 어서 연결하라는 재촉이라도 하려 함인가? 울리는 벨소리가 연속하여 귓가를 맴돌고 있다.
-여보세요.
드디어 연결되는 기미가 느껴지더니 이어서 아직 잠이 덜 깬 어눌한 목소리의 아내가 호출에 응답하는 소리로 나타난다.
-여보세요, 전화 잘 들려요?
한 달여 만에 걸어보는 휴대폰이라 성능이 제대로 발휘되는지 확인하느라 그런 말부터 해본다.
-예, 잘 들려요. 지금 어디쯤 왔어요?
그런 몇 마디 말이 오갔지만, 어느새 잠에서 정신을 차린 아내가 나의 위치부터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디 있는 거예요?
나도 아내의 위치를 짐작은 하면서도 묻는 것은, 바로 부산 앞바다를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부산에 있어요.
예상했던 대로 아내가 대답한다.
-나도 지금 부산 앞바다를 지나가고 있는 중이어요.
-하하하, 그렇군요.
지금 내가 쳐다보며 지나가고 있는 부산 영도에서 우리 배를 본다면 어떻게 보일까?
나의 눈 위치를 영도에 있는 둘째 애의 하숙집 언덕에다 두고 상상을 해본다.
그곳에 맞추어 준 눈 안으론 아치 섬과 태종대가 살짝 바다를 가린 곳 너머의 확 트인 대한해협에서 항해등을 밝힌 우리 배가 열심히 북상하고 있는 모습으로 눈에 드는 것 같은 기분을 가지게 한다.
-오늘 오후 2시면 포항에 도착하니, 그전에 포항으로 오세요.
-열두 시쯤 까지 가면 되겠네요.
-그래요, 그때 와서 식사도 하고 조금 기다리면 될 거예요.
-알았어요, 그럼 나중에 봐요.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서, 아이~ 참! 하는 탄성을 질러야 했다.
오늘이 바로 우리 둘의 결혼 32주년이 되는 날이어서, 축하한다는 말부터 할 거라고 작정하고 있었는데, 아내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반가운 기운부터 튀어나와 그만 깜박하니 축하의 말을 할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잠잘 시간을 자꾸 빼앗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다시 전화를 연결할까 하다가 그냥 참기로 한다.
아내는 며칠 전부터 군에 가서 첫 휴가를 나온 막내를 데리고, 둘째의 졸업식에 참석했다가, 오늘 포항에 입항하는 나와 만나려고 부산의 둘째 하숙집에 머무르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완전히 날이 밝아 당직 사관에게 브리지를 맡기고 식사를 하러 내려왔다. 몇 시간 후면 가족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 뱃사람에겐 가장 즐거운 입항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규정된 항만 보고 사항도 모두 끝 내주고, 드디어 도선사를 태워서 부두에 들어가는 마지막 단계로 들어서고 있었다.
도선선과도 통화가 되어 접근하고 있는 가운데, 별 일 아닌 사고이지만 당장 기관 사용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였다는 기관장의 보고에 잠시 당황한다.
즉시 선수루 일항사에게 두 개의 닻을 모두 비상 투묘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타는 오른쪽으로 전파시켜 가까스로 앞에 투묘하고 있는 배를 피해 다시 바깥쪽으로 선수를 돌려놓았다.
체크하고 수리하는데 30분이 걸릴 것이라고 이야기하므로, 다시 한번 기관사용을 할 수 있냐니까 불가능하다는 답변이다.
그렇다면 즉시 수리 작업에 착수토록 지시한다.
현사태에서 만약에 이제부터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 책임이 나에게 올 수 있는 상황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즉시 도선선을 불러 잠시 기관에 문제가 있어 지체된다니까 자기네가 접근해 오겠다고 이야기한다.
혹시 우리 배의 시정으로 도선 거부나 당하지 않을까? 우려하던 마음에서 우선은 벗어난다.
다행히 그려 구려 수리를 시작한 지 30분도 되지 않아 작업은 끝이 났다. 기관을 후진으로 사용하니 제대로 걸리어 한숨 돌리는데, 도선사가 상황을 문의해 와서 수리가 끝나고 입항이 가능하다고 기쁜 마음으로 말하니 즉시 승선하겠다고 연락을 주며 접근을 시작한다.
그렇게 늦어진 때문에 14시 도착을 1330시로 당겼던 마지막 예정은 다시 도로 아미타불이 된 셈이지만, 그 정도로 끝이 나서 다행이란 마음을 가지며 부두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부두에는 이미 몇 분의 선원 가족들이 통차를 타고 들어와서 접안하려는 우리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 아내와 막내의 반가운 모습도 끼어 있다.
접안이 끝나고 갱웨이 레더(현문사 다리)가 내려지자 가족들은 입항수속 나온 지점의 직원과 함께 배에 승선한다.
접안 작업을 모두 마치고 방으로 들어오니, 기다리고 있던 막내와 아내가 반갑게 맞이해 준다.
-우리들의 결혼기념일을 축하합니다.
새벽에 하지 못했던 인사말부터 해주며, 우리는 32년 전 결혼식 날에 화제를 맞추어 본다.
며칠간 계속되던 눈이 그치며 결혼식을 하던 당일은 화창하게 밝은 날씨였다. 그 기억을 되살리게 하려는지 오랜만에 맑고 따뜻한 햇살까지 비쳐주니 흡사 봄날 같은 기분이 다시 재회한 기쁨을 배가 시켜준다.
지난 15일에 서울 지방을 강타한 32년 만에 왔다는 폭설, 또한 그때의 기억을 북돋우는 일로 다가왔었다.
전방의 육군 소위들 중 결혼을 하려고 그날을 택일로 잡아 놓았던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내린 눈으로 길이 끊기어 결혼식 시간에 맞출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신부 혼자 결혼식을 치르게 됐다는 신문 보도도 났었다.
나도 사실은 결혼식 사흘 전에야 겨우 폭설이 내리고 있는 강원도 묵호항에 도착하여, 혹시 기찻길마저 눈으로 끊기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가지며 배를 내렸고, 힘들게 밤 열차 표를 얻을 수 있어서 겨우 집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저런 이야기로 예전을 돌아보며, 오늘은 비교적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음까지 안도하니 즐거워지는, 뱃사람들만이 갖는 애틋한 상봉의 시간이 저 혼자 짧아져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