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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희태 Feb 25. 2016

주묘(走錨) - 닻의 반란

항해 사관들에게 가장 짜증스러운 상황인 DRAGGING ANCHOR 

얼음 바다 속에 내려진 닻줄(앵카체인)의 모습

배를 타는 항해 사관으로서 승선 중에 제일 만나기 싫은 일 중의 하나가 주묘(走錨, DRAGGING ANCHOR)라는 상황이다. 닻이 할 일을 못하고 바람이나 조류에 의해 끌리게 되어 안전한 위치가 위험하게 변할 수 있는 사고를 뜻하는 말이 주묘이다. 따라서 언제 어느 곳에 닻을 내려 주더라도 항상 위급 시 기관을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한 상태로 정박 당직에 임하게 된다.  

 

새벽잠에서 깨어날 무렵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바람소리가 들리는 듯 싶어 커튼을 걷어 밖을 내다보니 제법 서슬 푸르게 일어난 파도가 흰 거품을 방금 갑판 위에다 뿌려주며 떠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심상치 않은 그 모습에 혹시 지금 배의 위치가 변해버린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걱정이 된다. 그제부터 시작한 메인 엔진 피스톤 발출 작업을 위해 현재 주기 4번 기통을 분해하고 있는 중이다. 만약 닻이라도 끌려 바쁘게 기관사용이라도 필요하게 되면 여간 난감한 일이 된다는 점을 일깨우며 선교로 올라간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듯이 온 브리지 내가 바람 소리로 씽씽 거리며 진동하는 가운데 풍향 풍속기는 선수 쪽에서 45~50노트의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다는 표시를 해주는 바늘이  정신없이 떨고 있다. 저 정도의 바람이라면 현재 7.5 샤클 만 내주고 있는 우리 배의 투묘 사정이 주묘로 이어질 것 같다는 걱정이 든다.

  

마침 걱정이 된 기관장도 브리지에 올라왔기에 현재 진행 중인 주기 보수작업을 중지하고 다시 조립하여 언제라도 엔진을 쓸 수 있게 해 달라고 주문한다.  


아침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지내놓고 기관장은 기관실로 나는 브리지로 올라가서 각자의 일에 들어간다.  

점점 더 세어지는 바람에 선수루가 허연 포말의 파도에 휩싸인다. 앞에 내보내어 닻을 감아들이는 일을 해야 하는 선원들의 사정이 은근히 걱정이 된다. 그래도 해야 할 일이니 선수루 부서 스탠바이를 걸어 즉시 닻을 감아 들일 준비를 시키다.  


그동안 GPS를 통한 속력이 0.1노트에서 계속 늘어나서 어느새 1.0노트를 표시하는데 이렇게 되면 주묘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선수를 바람과 파도 방향을 향해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새 선수가 바람 방향을 오른쪽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되어 거칠어진 파도가 우현 갑판 위를 휩쓸어 올라온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선체의 한 면을 계속 보이고 있다는 것은 닻이 끌리면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이다.  

비록 끌리기 시작하긴 했지만 그래도 닻이 버티고 있는 힘에 의해 선수가 어느 정도 잡히면서 풍상 쪽 현이 바람과 파도에 직각으로 노출되어 들이쳐오는 바람이나 파도가 풍상 현에서 풍하 현으로 지나치며 갑판 위에 있는 구조물들을 휩쓸어 가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뒤집힌 바다의 누런 황토 빛 파도가 우현에서 올라와 좌현 쪽으로 순식간에 휩쓸며 사라진다. 만약 저 파도 속에 앞으로 나가던 선원(사람)이 휩쓸리기라도 한다면 상상하기도 살 떨리는 상황이다. 다행히 좌현 쪽이 파도가 덜 올라온다는 사실을 알려준 후라 모두 좌현 갑판을 통해 선수에 나갔기에 그 무서운 파도는 인명 피해는 없이 그냥 지나갔다.  

현재 기관사용을 할 수 없으니 배는 DEADSHIP 상태로 어서 빨리 주기 복구 작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우선은 닻을 감아 들이기 시작한다. 내어준 우현 묘를 감아 들이며 좌현 묘는 언제라도 투묘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두고 있다.  한 번씩 찾아와서 파도를 덮어 씌우고 있는 날씨는 아직 몇 시간 넘어라도 계속할 태세라 닻이 끌리더라도 안전하게 끌려주기만을 기대하며 감아들였다.  

일항사로부터'One Shackle On Deck!'이라는 보고를 받으며 다시 투묘하여 제대로 선체를 같은 자리에  고정시켜주기 위해 새로이 닻을 내릴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였다.

원래는 좌현 묘로 바꾸어 내주려고 했던 것을 다시 우현 묘를 사용하기로  준비시켰다. 아무래도 우현 묘가 낫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다시 내어주는 닻을 이번에는 10 샤클까지 사용하기로 한다. 지금 우리 배에서 내줄 수 있는 최대의 샤클 양이다.  

그동안 지나치던 타선들과는 안전하게 다 지났건만 이제 우리 배의 뒤에 한 척 있는 것은 불안할 정도로  가까워질 수 있는 상황인데 그 배가 우리를 불러 본선의 닻이 끌리고 있으니 확인하라는 전달을 준다. 우리 배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경계한 이야기이다. 알겠다고 하고 이미 내어주기 시작한 닻줄을 계속 신출해준다.

  

10 샤클-275미터 길이의 닻줄이 다 나가고 이제 홀딩한 상태가 되니 배의 선수가 풍향 쪽을 향해 서려고 슬슬 돌아가기 시작한다.  이윽고 선수로 바람과 파도를 맞으며 서는 배의 자세로 인해 선내에 들어가 있으면 바람이 불거나 파도가 있단 사실을 모를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은 지켜보며 기상상황이 나아지기를 기다리기 시작한다. 새벽에 50노트까지 오르락 거리던 풍속기의 바늘이 그나마 40노트  정도까지 갔다가 금세 30노트대로 떨어지는 변덕 부리는 모습에 기대를 걸고 더욱 잦아들기를 기다리기 시작한다.  


재투묘해 준 후 만난 태양과 바다는 언제 심술부렸냐 싶게 조용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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