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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껴가는 비구름

배를 살짝 돌려 피해 준 소낙비구름

by 전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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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어두컴컴한 선수루(船首樓)에서 발밑을 조심하며 걸음을 옮겨 딛는데 갑자기 코 끝에 떨어지는 뜨뜻미지근한 물방울 감촉에 머리 들어 하늘을 본다.

좀 전 거주구를 빠져나올 때 보였던 별들의 모습이 모두 시꺼멓게 덮어 씌워진 구름에 가리어 더욱 어두워진 하늘이 그곳에서 나의 시선을 맞이하고 있다.


지금 그 하늘에서부터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며 그중의 한 방울이 마침 코끝에 정통으로 떨어지며 따뜻한 대기에 길들여져 미지근해진 감촉을 선사했던 것이다.

그냥 계속해서 갑판을 돌아도(운동을 해도) 괜찮을까?

의구심을 앞세우며 다시 가야 할 선미 쪽으로 눈길을 돌려본다.

아무리 구름이 덮어 씌워 저 어둡다 하더라도 여명이 찾아옴을 막을 수는 없는 것. 눈길이 스쳐 지나는 동녘 하늘이 있는 쯤에서 약하나마 빛이 배어 나와서 선수의 어둠을 어슴푸레하니 헤쳐 준다.


저 앞쪽에서 뿌옇게 비를 뿌리고 있는 비구름의 직접적인 모습이 어렴풋이 그 빛에 반사되어 보여 주고 있다.

이대로 걸음을 계속하면 저 비를 몽땅 맞이하여 물에 빠진 생쥐 꼴을 만들지도 모르는데... 하는 우려를 확인하려고 얼른 마스트의 꼭대기를 올려다본다.

그곳에는 회초리 안테나가 곧게 서 있어 조그마한 바람에도 몸을 휘어 주어 바람의 방향을 쉽게 알려주는 역할을 하기에 그걸 보려고 한 것이다.

마침 안테나는 네 시 방향으로 끝을 굽히고 있어 바람의 움직임이 선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부는 것을 확인하였다.

운동을 그대로 진행해도 비구름의 중심이 선수의 오른쪽을 좀 벗어나며 지나치게 되기에 비를 흠뻑 맞게 되지는 않을 것이란 판단을 해본다.


바로 그때, 아무래도 배의 선수가 왼쪽으로 좀 돌아가는 것 같아서 가만히 살피니 진짜로 선수가 왼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브리지 당직자가 어둠 속에서도, 센 비를 피하려면 약간만 왼쪽으로 침로를 바꿔주면 된다고 판단하고 그렇게 배를 잠깐 돌려주는 모양이다.


이런저런 상황에 마음을 놓고, 다시 운동을 계속하였는데, 빗방울은 몇 방울 더 내 얼굴에 떨어졌고, 대부분의 비는 나를 위해 잠시이긴 했지만 침로까지 수정해준 당직사관의 배려를 따라주듯, 멋있게 오른쪽으로 비껴가 버렸다.


오른쪽 가까이 지나치는 비의 중심이 해면에 뿌려지며 부딪쳐 나는 소리가 금세 귓속을 파고들 것 같이 느껴지지만, 나에게는 몇 방울의 비만 주고는 그냥 가버린 것이다.

그렇게 기분 좋게 운동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식사 후에 혈당치 검사를 해보기로 한다.


지난 1월 22일에 마지막으로 재어서 기록해 놓았으니, 오늘 다시 체크를 한다면 한 달 열흘쯤 만이다.

아침 식사 후 두 시간 만에 왼손 무명지에 바늘을 찔렀고 혈당치만 좋게 나오면 환호하고 감사하리라 마음먹으며 피 한 방울을 떨어 뜨려 준다.


금세 카운트를 시작하는 측정기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45에서부터 줄어들기 시작한 숫자가 마지막 단계인 3, 2, 1로 가며, 똑같은 시간 차이로 지워지고 나타남을 반복하고 있다.

이윽고 0 되더니 삐리릭~하는소리와 함께 나타난 숫자는 98이다.


너무나 선명한 모습의 두 자릿수를 보여주고 있어, 이제나저제나 마음 조리며 뚫어지듯 숫자판만을 주시하며 침도 삼키지 못하고 있던, 나를 순간적으로 야호! 하고 환호성을 지르며 주먹을 불끈 쥐어 하늘을 찌르듯이 겅정겅정 뛰게 만들어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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