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희태 Aug 28. 2017

빗물로 우려낸 차맛을 보며

찻물을 우려내게 빗물을 보내주고 보너스로 무지개까지 보여주고 있다.


 일본 규슈 남단 야쿠시마 남서쪽 도카라 해협을 30여 마일 앞에 두고 그곳에 들어서기 위해 열심히 달리고 있는 시점이지만 10여 마일 우리 앞에 있는 아네모네라는 이름의 배에게 엊저녁까지도 앞서가던 자리를 내어주고 뒤로 밀려난 기분은 한마디로 쓴 -입맛 다시기-이다.  


 알고 보면 그 배도 어지간히 나이가 들은 상태이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 배보다는 1.5에서 2 knots정도 빠른 속력을 내며 접근을 해와서 우리보다 늦게 호주를 출발한 상태에서 앞서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도착지까지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광양이라 꼼짝없이 선착선의 자리를 내어주는 수모(?)마저 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우리의 예상 도착시간을 그 배보다 늦어진 시간에 입항하게 될 것이란 통보를 광양지점에 해주었고 그에 따라 부두에의 접안도 자연히 이틀 정도 늦어진 24일 오전으로 되겠다는 연락마저 받아 놓고 있는 실정이지만 섭섭한 마음이야 여전히 앙금같이 남아있다. 


 중국에서 흘러나온 저기압이 동진하면서 일본의 규슈에 접근하고 있는 동지나해에의 기상 분포가 현재는 뒤바람을 선사하여 별 흔들림 없이 달리긴 해도 비가 많이 내리며 시정조차 불량하여 우울한 토요일을 덧 씌워 주고 있다. 


 어제 밤중과 오늘 새벽에 걸쳐 앞서기 시작한 그 배의 그림자는 이미 1-2마일 거리도 뿌옇게 흐려진 시정으로 인해 놓치고 있으며 단지 레이더 스코프 상에서 10여 마일 앞쪽에 흰 반점으로 나타나는 걸로 알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직접 눈으로 보지 않는 것이 어쩌면 샘 나 하는 심보에는 약이 되는 다행이라 위로하는 그런 심정을 알고 그럴까? 


 빗줄기가 점점 더 거세지기 시작하지만 바람은 불지를 않아, 비로 하여금 씻기는 갑판 청소를 또한 좋아하게 해준다. 톱 브리지 갑판 위에 내리는 대로 고여지던 빗물이 배의 잔잔한 롤링에 의해 한쪽으로 쏠리면서 스커퍼(SCUPPER)를 통해 흘러내리느라 쏴아 쿠룩쿠룩 꿀꺽거리며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윙 브리지의 바닥을 깨끗이 씻어서 닦아주고 있다. 


 너무나 맑은 그 빗물을 왜 인지 아까운 마음으로 보다가 문득 마셔도 좋은 하늘이 주신 선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저 물을 그대로 받아 찻물로 끓여 보는 거, 어때? 차는 내가 가져올 게. 

기발한 착상이나 한 듯이 우쭐한 기분으로 말을 내었다. 

-한번 그래 볼까요. 

당직 중인 조타수가 빈 페트병을 들고 나와 연신 쏟아 붓 듯 흘러내려 오는 빗물을 받기 시작한다. 


 몇 번을 받아 들고 살피다가 쏟아내고 다시 받는 걸 반복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니 물 안에 검댕이가 섞여 있어 그걸 걸러내려고 그러는 것이란 걸 알겠다. 

-굴뚝에서 나온 기름 검댕이가 톱 브리지에 떨어져 있다가 빗물에 휩쓸려 내려서요. 

하며 다시 조심스레 물을 받던 조타수는 이번에는 만족했는지 빗물로 가득 채워진 물병을 들고 허리를 펴며 일어선다. 


 페트병 하나 가득 채워진 물을 눈앞까지 들어 올려 자세히 살폈다. 맑은 물이 그대로 마시고 싶은 순간적인 강한 충동을 일으켰지만 그 일만은 참기로 한다. 


 커피포트에서 김이 나며 싸-아 하는 끓는 물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찻물은 준비가 되었으니 방으로 내려가서 마지막 남아있던 현미 녹차 세 봉지를 들고 올라왔다. 차를 준비하겠다던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다. 


 브리지에 있는 사람은 네 사람인데 남아있는 차 봉지는 세 봉지뿐이라 함께 우려내어 나눠 마시는 방식을 택하기로 하고 차를 우려낸 물을 네 컵에 나누어 담아 분배한다. 

-어때요? 차 맛이 그럴 듯 하지요? 물맛이 단 것 같지 않아요? 

물어보는 내 말을 듣고도 모두들 찻잔을 들어 음미하듯 마시지만 빙긋이 웃기만 하고 대답은 안 한다. 

-기분적으로도 맛이 다르긴 할 거요. 하늘이 주신 찻물이니까요.


 진짜 차 맛이 고소하고 입안에 남아도는 향이 있고 물맛은 단 것 같은 느낌을 가지며 열심히 홀짝거리다 보니 금세 내 몫의 차 한 잔을 다 마셔버렸다. 

운치 있게 차를 마시기와는 틀려 있는 나의 끽다 습관 때문이다. 

-아, 이제야 차 맛이 제대로 나는 군요. 근데 선장님은 왜 차를 안 마십니까?

너무 빨리 마셔버리는 끽다 습관을 가진 나에게, 아직 차가 배당되지 않은 사람 대하는 듯이 시치미 떼고 누군가 농담을 건다.


-차 맛이 너무 좋아 당신이 선수 쳐서 마셔버린 거 아니야? ㅎㅎㅎ

나 역시 농담으로 응수하며 빗물로 우려낸 차 맛을 처음으로 음미하는 즐거움에 빠져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수박을 보면 생각나는 일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