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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희태 Aug 27. 2017

수박을 보면 생각나는 일들

4.19 때 만났던 수박

내가 가꾼 수박


 냉장고에 넣어 두었던 시원한 수박을 꺼내 점심 후식으로 먹고 있는 오늘은 4.19이다.

수박의 시원하고 달콤한 맛을 음미하다 보니, 예전 4.19 때 무소불위의 권력에 빠져 들어 나라와 국민들을 저버렸다가 쫓겨나게 되었던 이기붕 씨가 살았던 서대문 경무대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저택에서 나왔다는 수박의 모습이 문득 떠 오른다.


 당시 서대문 네거리에 세월을 잊고 나타난 수박 모습은 이채로운 볼거리였다. 데모대에 의해 내팽개쳐진 채 발길에 차이고 깨어져서, 새빨간 속내를 드러내면서 지나는 사람들 모두의 빈축 아래 시들고 썩어 갈 수밖에 없었던 수박 말이다. 

 그 절기에 서민의 집에서는 보기 힘든 과일로서, 권력에 업혀 나타난 셈이니 그에 대한 질시 역시 대단했던 것 으로 여겨진다. 하여간 그 사건 이후 지금은 아무 때 어느 곳에서나 흔히 눈에 뜨이고 쉽게 먹을 수 있는 수박이지만, 나는 수박을 만날 때마다 서대문 로터리와 4.19가 생각나곤 한다. 


 점심 숟가락을 놓고 나서 마침 후식으로 나온 수박 한 조각을 즐기면서 한담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4.19 그날을 전후한 무렵의 내가 보고 겪었던 광경들을 그대로 이야기로 엮어내니, 아직도 생생한 기억 속의 모습이며 분위기가 막힘없이 술술 이어져 나왔고, 듣는 이들은 새삼 신기한 이야기를 경청하는 양 귀를 기울이며 침잠하는 모습이 너무도 진지하다. 


 사실 내 기분으론 아직도 몇 년 흐르지 않은 최근의 일 같이 치부되어 그저 얼마 전에 있었던 사실이니, 앞에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들도 당연히 그 일을 알고 있을 것이란 염두를 가지고 말을 시작했었다. 

근데 말을 하다가 가만히 셈하고 헤아려보니, 자그마치 41년 전의 옛날 일이 아닌가? 

그러니 앞에 앉아 내 이야기를 듣는 동료들은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거나 태어났어도 아직 젖비린내 나는 어린애였다는 사실에 새삼 나의 가슴으로 눈길을 돌리어 세월의 덧없음을 실감해 본다. 


 이야기가 나오다 보니, 수박에 얽혀 있던 또 다른 사연인 해양대학 다닐 때 있었던 어느 날도 떠올려진다. 

62년 봄방학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제법 쌀쌀한 바닷바람이 불던 날이었다. 부산항에서 수리를 하려고 닻을 내려놓고 있던 대만 국적의 그 당시로는 제법 큼지막한 배에 올라 선박탐방기사를 쓴다고 학보사 기자 입장으로 방선을 한 적이 있었다. 


 선장을 비롯한 다른 선원들은 수리하는 일에 매달려 있어 잠깐 인사만 나누고 좀 한가한 통신장의 안내로 선내를 둘러보며 취재를 하였는데, 마침 점심때가 되어 식사대접을 받게 되었다. 


 잘 차려진 식탁에서(그 후 나도 현역에서 일하면서 그 당시를 생각하면 그들은 제법 배려를 한 상차림으로 대접해주었다는 느낌을 갖곤 했다) 다른 중국 음식이야 이름부터 몰랐으니 지금도 알 수 없지만, 하여튼 푸짐한 식탁의 한가운데 올려져 있던, 계절을 잊고 나타난 화려한 모습으로 내 눈앞에 놓여 있던 수박에 대해서는 신비감마저 풍겨지는 동경(憧憬)의 정까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요새는 수박이 그렇게 비싸거나 아무 때나 구할 수 없는 계절을 고수하는 과일이 아니니,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다는 게 당연한 일로 치부되지만 그날 역시 계절적으로 우리에겐 낯 설은 과일 일 수밖에 없었던 수박을 만난 옛이야기를 계속하다 보니, 그 시절이 가난하고 못살았던 때라는 걸 이제는 확실하게 실감이 된다. 


 우리나라 선박의 총 보유 G/T가 30만 톤을 넘지 못하던 그 시절에, 배 타는 학교에 들어가 졸업 때까지도 아직 확실한 승선에 대한 장미 빛 미래를 장담 못하던 세월이었다. 


 그래도 군 복무를 마치고 나서부터 열리기 시작한 승선의 기회가 결국 현재의 우리 해운의 주소를 마련하던 바로 그 밑거름의 세월이었고, 그 밀려드는 파도 같은 바쁜 일익에 내가 함께 있었다는 걸 행운으로 감사하면서 어느새 내 인생의 봄날도 저만치 흘러 가버렸음을 퍼뜩 깨달아 보는 요즘이다.

 

아뿔싸! 파도가 육지에 닿으면 부서져 버리는 운명같이, 나 역시 어느새 앞장선 파도를 따라 육지로 밀려나듯 흘러 나가야 하는 세월까지 함께 받아들이고 있는 거네.


 지난날 수박 한통 본 이야기를 이렇게 하다 보니, 그게 다 흘러간 옛이야기가 되어 그만큼을 내가 살아왔다는 증거의 한 가닥이 되어주는 요즘, 모든 게 다 삶에선 잊지 못할 일로 남겨지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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