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장의 당직은 일반인의 상상과는 조금 다르다.
저녁 식사 후 점점 나빠지는 날씨가 마뜩찮고, 자신의 뉴캐슬 방문 스케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도착시간이, 자꾸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데에 초조해진 금항차 본선에 승선하여 호주 뉴캐슬까지 가고 있는 여객 손님이 밤늦게 브리지로 올라왔다. 이것저것 현황을 파악하던 중, 빗줄기가 심하게 뿌리치며, 바람마저 세어지는 깜깜한 전방을 한참 동안 주시하더니,
-이렇게 날씨가 나쁜 날은 아무래도 삼항사 당직은 선장님이 서시는 거죠? 물어 온다.
지금은 저녁 8시가 넘은 시간으로 밤 12시까지는 3등항해사의 항해 당직 시간인데 현 상황을 비상한 순간으로 여긴다면 당연히 선장이 현장에 있어야 하는 점을 염두에 두고 묻는 것 같다. 물음 그대로 그 분이 알고 있는 선장의 선교근무수칙에 관한 승선생활의 상식선에서 - 예스 - 를 택해 대답을 해주면 가장 무난한 응수의 대답이 될 터인데, 순간적으로 그렇게 대답하면 그 분이 우리를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범위를 모두 인정해주는 경우가 되면서 선장으로서의 운신의 폭이 좁아지는 것 같은 느낌의 반발심이 생겨난다.
이미 브리지에 올라와 있었으니 손님의 물음에 그가 원하는 방향의 긍정적인 대답만 해주면 긴말이 필요 없는 대화로 끝날 일이건만, 순간적으로 버팅기고 싶은 오기마저 발동한 것이다. 손님이 자신의 지난 세월 해운과 관련된 공직에 있을 때 알게 된 현장 사항을 한번 쯤 확인하고 싶은 뜻이 들어 보이는 점이 거슬리는 느낌으로 들어선 것이다,
-아니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하고 일단은 부인하는 말을 한 후에
-당직사관이 불안한 마음이 생겨 선장이 필요하다고 요청할 때면 언제든지 올라오는 거죠.
그가 물어보며 속으로 듣고 싶었던, -그렇지요. 라는 모범 답과는 좀 동떨어진 대답이 되었겠지만 그래도 정확한 대답이긴 하다.
사실 오늘 밤 내가 브리지에 올라 온 것은 삼항사의 요청이 있어서가 아니고, 내 스스로의 판단으로 모든 선내 상황을 스스로 알아보려는 평소의 선장직으로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손님이 물어 본 의도가 이렇게 기상이 험악한 날들엔 선장이 직접 조선(操船)에 나서서 안전을 챙겨야하지 않겠느냐는, 다시 말해 현재 자신은 삼항사가 신참이라 미덥지 못한 불안감이 있어 경험이 많은 선장이 직접 나서서 배를 몰아주면, 자신이 안심할 수 있겠다는 마음마저 내 비친 게 아닐까? 그런 뜻 자체가 일종의 월권행위 같은 기분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일반인들이 배에 승선하는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날씨가 나빠질 때라든가 하여간 승선 상황에 불안감이나 공포감이 생길 때 그 어려움은 아무래도 배에서는 직책상 제일 믿음직한 사람이 선장이므로, 그가 직접 앞에 나서서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게 마련이다.
손님의 그 당시 질문을 시도한 의도 역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무의식이 표출되며 생긴 질문일거라는 느낌이 순간적으로 와 닿았기에 일부러 둘러치는 식의 대답을 한 것 같다. 그러나 곧이곧대로 선장의 24시간 당직 의무의 뜻을 밝히지 않고 현재와 같은 날씨라고 언제나 직접 나서지는 않는다고 꼬집듯 이야기한 뜻은, 말을 물어 온 손님이 해운계를 아주 잘 알고 있는 인물이어서 일반인들에게 하듯이 적당히 대답하여 얼렁뚱땅 넘어가는 것은 옳지도 않고 통하지도 않을 생각을 품고 있을 것이란 판단이 들어 그리 했던 것이기도 하다.
사실 오늘 정도의 날씨에 삼항사를 제치고 선장이 직접 조선에 나서야 한다면 선장이란 직책은 항상 선교에서 헤어나기가 쉽지 않은 직책이 될 것이란 여운마저 띠우면서 한 대답이었다. 결과적으로 손님은 무의식적으로 시도한(?) 선장의 브리지 근무 사항을 확인 바랬던 일이 불발이 된 불만감을 해소하지 못한 마음이 시무룩한 표정되어 있다가 잠시 후 말없이 브리지를 떠나갔다.
그런 보이지 않는 감정의 골들이 연싸움하는 실타래처럼 팽팽히 전개되고 있든 와중에도 며칠간을 열심히 달리며 맞추어 놓았던 ETA(Estimated Time of Arrival : 도착예정시간)가, 어제 밤부터 지금까지도 배의 이마를 향해 사정없이 불어젖히고 있는 앞바람의 간섭으로,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 나도 방으로 내려와 잠을 청하기로 한다.
마치 지프차가 자갈밭을 통과할 때 치러내는 것 같은 덜컹거리는 흔들림을 주던 선체 동요가 잠결에 좀 수그러드는 느낌이 들면서 오히려 잠을 깨웠다. 시침이 새벽 세시를 가리키고 있다. 당직사관(이항사)에게 전화를 걸어 현 상황을 물어본다. 다행스럽게도 날씨가 좀 나아지고 있다는 대답이 온다.
아침 식사 후, 좀 편해진 날씨를 확인받으며 ETA가 당겨지는 기대를 품으며 올라간 해도실에서, 컴퍼스와 디바이더를 들고 설쳐 보았지만 이미 내일 10시 도착은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일로 되어있다.
따라서 다음의 최선인 15,6 노트의 속력이면 가능한, 11시 도착에 기대를 걸면서도 전보는 11시 30분으로 30분의 여유를 가진 도착 통보를 대리점에 보내주며 브리지를 내려왔다. 본선의 여객 손님은 외항에 도착 즉시 헬리콥터로 하선 할 것이라는 통보를 주며 그에 알맞은 도착 시간을 빨리 알려 달라는 대리점의 요청에 대한 최종 회신이었다.
이번에 승선하신 여객은 해운항만청 관계의 고위 공직을 끝으로 퇴임한 전직공무원으로서 호주의 무슨 세미나에 참여하기 위해 본선으로 출국하여 이번 항차 같이 항해 중인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