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피항기
닻을 거두어들이고 배를 투묘지 부근의 해역에 띄어 놓은 채 기상 상태의 양호한 회복을 기다려야 하겠지만, 투묘 중이던 많은 배들이 한꺼번에 닻을 감아 피항을 하려는 상태이므로 황천과 함께 복작거리는 배들의 형편을 감안하여 아예 배들이 적은 곳을 택하기 위해 선수를 외해 쪽으로 향하게 하였다.
그렇게 밤새 선체 동요가 가장 적은 상태인 바람을 등지고 최저속으로 달리던 형편에서 이제는 다시 원래의 묘박지 쪽으로 돌아가기 위해 배를 돌리기로 했다.
지금껏 등진 바람으로 인해 속력이 보태어져서 7.5노트로 달리던 스피드가, 선수를 반대로 돌려주자 마자 엔진의 힘을 반속으로 올려 주었는데도 제자리걸음을 한다.
제 속력을 내지 못하고 뒤로 밀려나니 결국은 타효(조타기의 지시된 타각을 유지하는 선체 운동 효과) 마저 미약해져 선수가 제멋대로 돌더니 어느새 선체를 파곡에 기다랗게 눕히는 위험한 롤링에 빠져들게 한다.
위험한 순간적인 선체 운동에서 벗어나기 위해 즉시 배를 다시 돌려주려고 하드 포트(왼쪽으로 타각을 35도 돌리도록 하는 최대 타각 지시 조타 명령)를 명하였다.
선수가 왼쪽으로 돌기 시작하여 다시 한번 더 파곡에 들었다가 빠져나오는 순간 힘든 롤링으로 온몸이 기울어지고 있다.
브리지 내에 있는 스톰 레일을 움켜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눈길은 저절로 크리노미터(경사계)를 향한다. 양현으로 30도씩을 기울었던 상황을 시침 표지로 남겨 놓은 경사 계기가 그야말로 시치미 뚝뗀 체 내려다보고 있다.
배를 다시 피항하던 침로로 되돌려 준 후 회항은 좀 더 관망하기로 한다.
할 수 없이 떠밀리듯 또 하루를 그리 지내고 난 새벽 2시.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워서 창틀의 커튼을 살짝 걷으며 바깥을 내다본다.
희뿌연 대기가 바다와 맞닿아 수평선도 흐리게 해 놓은 상태인데 이따금 구름이 휩쓸려 흘러가버린 하늘에 푸른빛의 한 끝을 조금씩 내보이어 아직은 전체적으론 계속 음침한 날씨이지만 폭풍이 점점 멀어져 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배를 원래 있던 곳을 향해 돌아가야 할 때가 된 것으로 판단한다.
브리지로 전화를 거는데 계속 통화 중 신호가 나온다. 전화기를 잘못 놓았는가 싶어 그냥 브리지로 올라간다.
-날씨가 많이 나아졌지? 이젠 배를 좀 돌려야겠는데.
당직 중인 2 항사에게 말을 건다.
-예, 엊저녁보다는 많이 나아지고 있습니다.
-그래, 엔진을 풀 어헤드로 올리도록 해.
-예, 엔진 풀 어헤드로 올리겠습니다.
기관실에 연락하여 엔진 사용을 알린 후, 즉시 텔레그라프를 전속 전진에 놓아준다.
-지금 선속이 몇 노트로 올라갔어?
엔진이 증속 되는 시간을 기다렸다가 2 항사에게 묻는다.
-예, 7 노트입니다.
-그럼 됐어. 배 돌리기를 시작하자!
-하드 포트!
조타 명령을 정식으로 내리니 타를 잡고 있던 필리핀 타수가
-하드 포트!
복창하며 타륜을 왼쪽으로 돌리기 시작한다.
타 효가 배어 들기 시작한 배가 슬금슬금 돌아가기를 시작하더니 어느새 빠른 속도의 선수 회전이 시작된다.
20도로 가던 침로가 10도, 0도, 그리고 350도, 계속 왼쪽으로 줄어드는 도수를 조타수가 계속 10도 간격으로 복창하여 알려 준다.
한 번은 크게 흔들릴 각오를 하며 시작한 조타였는데 마침 때를 잘 잡아 돌리게 되어 그런지 심한 횡요도 없이 목적한 190도에 도달하여 정침 시킨다.
-자 그럼 잘 보고 가도록 해. 수고했어!
변침 후의 상태를 면밀히 살펴본 후 2 항사에게 항해 당직을 맡기고 브리지를 떠난다.
날씨에 밀려서 계속 멀어지는 항구에 은근히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었다. 그래서 빨리 돌려놓고 봐야지 했었다.
이제 속력이야 기관 반속 상황에서 1.7노트 밖에 안 나가지만, 그래도 6~7노트로 계속 멀어지던 상황에서 벗어나 투묘지로 되돌아 가게 된 상황에 안도한다.
토끼잠으로 지났던 이틀 간의 피로를 풀기 위해 편안해진 마음으로 침상에 몸을 눕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