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주는 뱃사람의 연륜
어제 오후 내가 요청한 대만해협을 통과하는 방안을 루팅 컴퍼니에서 인정하여 13시에 추천항로를 대만해협으로 향한 코스로 수정해 주었다.
20도 정도 왼쪽으로 돌려준 그 침로를 택한 후, 배는 하루 만에 대만 해협으로 들어서게 되었고 두시 방향에서 오는 커다란 너울에 의해 흔들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많이 편해진 마음으로 항해를 계속하고 있다.
그런데 내일쯤이면 오른쪽으로 돌아서 멀어져 갈 것이라 예상하고 우리의 항로를 재선정 해 준 루팅 컴퍼니(ROUTING COMPANY)의 예상과 달리 일본 기상청의 태풍 진로는 지금 자리에서 머뭇거리다가 내일쯤부터 움직이기 시작할 건데 그 방향이 대만 북부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서 어쩌면 추석을 지난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북상에다 초점이 맞춰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배 입장은 그렇게 이틀 정도 머뭇거리는 예상 때에도 빨리 달려서 태풍의 영향권을 벗어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니 계획대로 진행하기로 한다.
다행히 구름은 좀 깔려 있지만 날이 맑은 상태이고 엊저녁까지 구불렁거리며 달려들던 기다란 너울이 오늘은 많이 가라앉아서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달리고 있다.
아직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는 가오슝 항만을 부르고 응답하는 VHF의 통화 소리가 어울려 나오는 걸 들으며 잠시 태풍의 존재를 덮어둔 채 주위를 살필 여유를 가져본다.
그곳을 기항하려고 찾아든 경우는 아니지만 사람들이 서로 부르고 응답하는 소리를 들으니 어쨌든 가까운 주위에 우리 같은 이웃이 있다는 점이 안심하는 마음을 살며시 더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후 들어 대만 중부를 벗어나 북쪽으로 들어서면서부터 갑자기 세어지는 바람으로 인해 선체가 부르르 떠는 충격을 한 번씩 받아 다시금 마음을 불안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런 형편은 <시간아 빨리 지나가라!> 고 성화 같은 마음을 만들어 가지게 하고 있다.
사실 이 나이에 시간더러 빨리 가라고 바라는 것은, 빨리 죽겠다고 떼쓰는 일이나 진배없는데도 그러는 이유는, 지금의 상태에 파 묻혀 있는 것이 그만큼 힘들다는 의미가 아닌가
불청객 태풍과의 조우를 피하려고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그 결과가 빨리 나타나 주길 기다리는 이 힘든 순간들이 너무나도 초조하게 마음을 조이기 때문이다.
사실할 수 있는 방법은 다해 보려 한다지만, 할 수 있는 일이란 것이 실제로는 여러 가지로 많이 있는 마땅한 상황도 아닌 것이 <태풍 피항>이란 일이다.
그냥 간단히 생각하면, 태풍이 안전하게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괜찮다 싶을 때 슬슬 움직이면 되는 것이겠지만 그렇게 마냥 물 위에 떠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만들어진 배가 아니니 어떻게 해서라도 목적지에 늦지 않게 도착하도록 움직이며 피해야 하려니까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태풍이 이리저리 움직이겠다고 여겨지는 곳을 미리 피해가며 될수록 그 위치에서 멀리 떨어진 갈길을 택해 빠져나가는 방법인데, 만약 예상이 빗나가기라도 한다면 최악의 경우 태풍과 할 수 없는 조우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정도의 긴박감을 가지고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오늘 현재 상황은 대만의 동쪽에서 대만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태풍을 두고 있다. 그 움직임이 최소한 대만을 거쳐서 다시 북상, 북동 향으로 움직일 것으로 예상하고, 태풍이 그곳에서 꾸물거리고 있는 동안 우리는 최대의 속력으로 태풍의 북쪽에서 거리를 넓혀가며 영향권을 벗어나 우리 갈 곳을 향해 먼저 달리는 방법으로 결정하여 이제 겨우 대만의 북쪽을 빠져나와 북상 중에 들어선 것이다.
구름이 잔뜩 끼어 있는 날씨이긴 하지만 햇빛도 비치며 그런대로 음울한 기운은 벗어난 날씨여서 바람이 제법 불어 백파가 파도의 꽃을 피워주고 있건만 잠깐 긴장의 끈을 늦추어 본다.
그러다 한 번씩 선수를 향해 큰 해머를 휘둘러 주먹질을 하듯 꽝하는 굉음과 함께 너울이 쳐오면 긴장감은 다시 되풀이되어 돌아오곤 한다.
선수는 그때마다 허연 포말을 잔뜩 뒤집어쓴 모습을 툭툭 털어내며 몸을 부르르 떨어주는 일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 상황을 눈으로 몸으로 느낄 때마다 식어빠진 찻물을 억지로 마실 때 느껴지는 씁쓸함을 훨씬 넘어서는 쓰디쓴 입맛을 다시게 한다.
그래도 이런 형편에서도 11노트의 속력을 유지해 주며 견뎌내 주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그때마다 속으로 <하느님 고맙습니다>를 외우는 그냥 약한 존재의 내 모습이다.
태풍이 아직도 이틀 정도 대만 부근에 머무르고 있을 예상을 믿으며 북상을 감행하고 있는 우리 배인데 또 한 척의 벌크선이 우리 옆을 저만큼 앞서며 동행하고 있다.
사실 현재 같은 어려운 상황에서 나 혼자 일 때보다는, 옆에 같은 생각의 동무가 있다는 현실이 일종의 안도감까지 주고 있으니 반가운 일이긴 하지만, 그 배가 우리보다 2노트가 더 빠른 속력을 가지고 있어 점점 앞으로 나가는 모양이 이번에는 부러움과 일종의 질투심마저 유발하고 있다.
한편 우리와는 반대로 대만해협을 향해 내려가고 있는 여러 척의 배들 모습을 보며 혹시 그중에 성능이 떨어지는 배가 있어 대만을 미쳐 빠져나가기 전에 태풍과 조우하면 어쩌나 하는 오지랖 넓게 남의 걱정을 하게 되는 나 자신이 신기한 생각마저 품게 한다.
불행하게도 태풍과 직통으로 만나게 된다면, 지금 전 세계에 시끄러운 뉴스인 소말리아 근해에서 납치된 인질 사태의 선원들 형편보다도 더욱 비참한 일을 순식간에 겪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인질은 어쨌건 목숨은 살아 있는 상태로 시작되지만, 태풍에 휩쓸린다는 것은 그 상황에서 목숨과 함께 아무것도 남지 않고 깜깜 해지는 허무한 경우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을 모두 딛고 일어나 별다른 해난사고 없이 이번 태풍과의 인과관계가 끝나 줄 것이라 믿으며, 다시 내 형편으로 돌아와 열심히 정보를 수집하며 현재의 태풍 상황을 체크하고 있다.
오늘 하루만 더 이런 작은 황천에 시달리고 나면 내일부터는 날씨가 회복되어 편안한 항해를 할 수 있다는 믿음과 각오를 가질 즈음, 몸은 흔들리는 배의 롤링 주기와 일치하기 위해, 윗몸 살짝이 흔들어 균형 잡아주는 운동을 알게 모르게 계속하고 있다.
그런 감각들이 몸에 익어져야 진짜의 뱃사람이 되는 거란다. 40여 년을 넘어서는 승선 경험이 몸에게 알려주고 있는 모습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