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 두리 호와의 인연기
10. 오션 퀸 호를 만나다
10. 오션 퀸 호를 만나다.
역전 노장의 모습이 몸에 배인 오션퀸 모습. 예전과 달라진 것은 굴뚝에 그려진 회사의 로고 뿐이다.
엊저녁 어두워지면서 싱가포르를 떠나 밤새 달려서 들어선 말락카 해협의 남동쪽 입구 부근이다.
뒤에서 열심히 따라오는 배가 오션 퀸임을 알아차리고 편한 마음으로 추월을 인정해주며 10노트 속력의 달리기를 계속 유지하기로 한다. 이곳이 VTS(*주 1) zone 치고는 넓은 편에 속하는 해역이라 좀 여유로운 마음으 피추월 상황에 응할 수 있었지만 더하여 거기엔 그 배 오션 퀸호에 대한 반가운 마음도 많이 들어 있었다.
싱가포르를 출항할 무렵 VTS에서 쓰는 VHF 찬넬에서 오션 퀸 이란 배 이름을 얼핏 들었을 때 만 해도 같은 이름을 가진 배가 또 있는 걸까? 하면서도 알아볼 길이 마땅치 않아 그냥 두었었다.
이제 추월을 당하며 보니 1980년대 중 후반에 내가 승선해서 여러 가지 특이한 경험을 해봤던 그 배가 맞다.
그때와 다름없이 지금도 이 배는 브라질의 투바라오에 가서 석탄을 싣는 예정으로 달리고 있단다. 참으로 반가운 마음 절로 들어선다.
예전에 탔었던 배와 지금 타고 있는 배로 갈린 두 배 오션 퀸과 두리와의 인연을 각각 살펴본다.
한 배는 한때 오랫동안 타기도 했던 배였고, 또 한 배는 이제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해주려고 승선 중인 배다.
서로의 가는 길이 극명하게 갈라서고 있는 아이러니칼 한 두 배의 운명을 이곳 말락카 해협의 수로에서 만나며 양쪽 모두와의 인연의 끈을 똑같이 내가 매어 쥐고 있다고 생각하니 느낌이 남다르다.
사실 그 배와 나와의 인연의 끄나풀은 남다른 점이 많은 너무나 질긴 모습이었다.
어쩌다 이곳 환하게 빛나는 말락카 해협의 눈부신 태양 아래서 재회를 하게 되는 이유가 뭘까?
마침 그 배의 당직 항해사가 추월하기 위한 서로의 의도를 타협하려고 VHF로 우리를 부른다. 본선 좌현 쪽으로 추월하기에 동의해 주기로 한다. 국제 헤상충돌예방법상 이젠 우리 배도 피추월을 위한 피항 협조 등의 의무를 가지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같은 한국적 배이고 기왕지사 이야기가 시작되었으니 서로의 사정이나 알고 싶은 점들을 이야기하며 통항할 수 있는 기회가 이어진다.
나도 전화를 바꿔서 그 배 저간의 사정을 물어보기로 한다. 혹시 옛 인연과 닿아 있는 사람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그저 기대로 끝내기로 한다.
사실은 내가 전화를 바꿔서 나가니 상대방이 나의 존재를 버겁게 느꼈 음인지 전화의 응대가 너무 공손하게 변하여 말을 더 걸어 보기가 민망하여 끊게 된 것이다. 하기야 그 배의 역사가 시작될 무렵부터 승선을 했던 옛 선장으로 그 배 역사에 들어 있는 이름임을 듣고 절로 그런 분위기로 변하게 됨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이제 두 배의 상황을 비교해 보면서 피추월 상황에서 벗어나 보기로 한다.
두리호는 그때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보다 조선 실력이 앞섰던 일본의 조선소에서 1980년에 신조를 시작하였고, 오신 퀸은 아마도 1987년도 에 거제 대우조선소에서 야심 차게 만든 배로 당시 범양상선에 인계되었는데 첫 항차 대서양에서 황천에 조우하며 외판이 상하는 고통도 겪으며 수리를 통해 재정비해가며 성장해 온 배다.
바다 위에서 참으로 가깝게 만나는 지금 이 순간에 이르러 두리는 여섯 군데의 선주 품을 드나들며 오대양을 누비다가 마지막 순간으로 인간에 대한 봉사를 끝내려 하는 중인데, 오신 퀸은 아직도 현역으로 뛰려고 열심히 선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는 중이다.
처녀 항차에 큰 곤욕을 치룬 흔적을 수리하고 난 배에 교대하여 승선하려고 회사와 미팅을 가졌던 자리에서, 바람 만나면 꼼작 못하는 배이니 큰 바람은 미리미리 피해 다니라는 우스개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승선하였던 오션 퀸호였다.
지금 이렇게 건재한 모습으로 우리를 바짝 쫓아와서 5 케이블 정도의 가까운 거리를 두면서 추월해 앞서 나가고 있는 모습으로 만나고 있다.
이런 피추월을 당하는 경우, 다른 배들 같으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을 건데 지금은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 않은 반가움이 더욱 클 뿐이다.
열심히 그 배를 건너다보며 사진을 찍어주고 있는데 갑자기 ‘꽝’ 하는 굉음이 울려 퍼지며 들려온다.
무슨 일인가? 카메라를 내리며 급히 확인하니 마침 코앞을 지나듯 가까이 지나는 그 배의 9번 창 안에서 무슨 일이 있어 수리하며 내는 소리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9번 창 해치커버가 활짝 열러 있는 걸 보니 거기서 나는 소리라는 걸 금세 알아 버린 것이다. 내가 타고 있던 시절에도 종종 선창 내의 수리를 위해 항해 중에 해치커버를 열어 놓고 항해한 적이 있았다는 기억이 살아나 빙긋이 미소를 띠워준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를 앞에 두고 갑자기 그가 가졌던 다정한 예전 버릇을 생각해 낸 것 같은 아스라한 따사로움이 묻어나는 느낌이 들어 잠시 그때로 돌아가 보게 한다.
바람이 조금이라도 불었다 하면 그 지나쳐가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너무나도 듣기 싫어서 귀를 틀어막아 보던 때도 있었건만 이제는 그런 일 조차 다 용서해줄 수 있는 아름다운 추억의 페이지 위에 머무르고 있다.
하지만 잊을 수없는 오션 퀸과 내가 공유하고 있는 진짜로 극적이고 은밀한 이야기가 한 가지 더 있다.
한밤중 인기척에 깨어났을 때, 내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해적을 만나야했던 기억이다.
남아공 리처드 베이에서 석탄을 싣고 순다 해협을 통해 인도네시아로 들어섰고 보르네오 서쪽 적도 해역을 북상하던 그때 오션 퀸호는 메인 엔진 터보-차자 한 대가 고장을 일으켜서 감통 운전을 시행하며 귀국 항해를 하던 중으로 깜깜한 그믐 밤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이들은 작은 배로 접근하여 배 안으로 침입한 후, 문을 잠그지 않고 잠들어 있던 내방에 스며들었다가 기회를 보아 나를 덮쳤던 것이다.
-굿모닝 캡틴,
이런 인사말로 여유를 잡으며 나를 깨운 이들은 순간적인 판단으로 대항하기를 포기해준 나를 향해 금고문을 열도록 하였고 그 안에 있던 선용금과 내 사물함에 있던 지갑과 시계 등을 가지고 유유히 사라져 갔던 것이다. 내 삶에서 추억하기 싫은 기억 중의 하나이다.
터그보트가 밀면서 셍긴 선체 외판의 군데군데 페인트 까진 자리를 무슨 훈장처럼 보이며 오션 퀸은 역전 노장처럼 늠름한 모습으로 지금 두리의 옆을 지나쳐 앞서 나가기 시작한다.
그까짓 조무래기 해적 따위에 당했던 일일랑 잊고 떨쳐 버리라는 듯 무심하게 앞서고 있는 오션 퀸 그녀는 앞으로도 27일이 더 지난 5월 8일쯤에 브라질 투바라오에 도착할 예정을 가지고 있단다.
말락카를 빠져나가 인도양을 가로질러서 아프리카 희망봉을 오른쪽으로 두며 다시 남대서양을 건너가서야 도착하게 되는 대 장정의 항해인 것이다.
사실 두리가 더욱 사정이 나쁜 축이라 그렇지 오션 퀸도 또래의 배들 중에 그렇게 빠른 축에 드는 성능을 가진 배는 아니다. 당시에 나는 이렇게 긴 항해를 그저 끈기로 버티며 항해를 억지로 즐기듯이 생활해 왔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역조를 받아서 8.5노트에 허덕이며 달리는 두리를 11.5 노트의 스피드로 앞서가며 옛 추억의 모습을 ‘꽝’하는 소리까지 곁들여서 정겹게 전해주며 어느새 저만큼 앞서 나가는 그녀에게 안전 항해를 빌어준다.
두리호를 앞질러 앞서나가기 시작하는 오션퀸의 모습.
*주 1 : VTS (VESSEL TRAFFIC SCHEME ) ZONE, 유엔 해사국 IMO의 주관 하에 국제적으로 선박의 통항이 많은 좁은 해역에 관할 국가가 선박의 통항 방향을 강제로 유도하는 통항 분리대를 만들어 안전 항행을 도모하게 해도상에 표시된 구역을 말함.
이 구역을 항행하는 모든 선박은 그곳을 관장하는 당국이 정한 항로의 안전통항 방향 수칙을 따라 항행에 임해야 하고 규칙이 정한 통신 방안도 갖추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