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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두리 호와의 인연기

ONE FATHOM BANK 부근의 고장 난 배

by 전희태

11. ONE FATHOM BANK 부근의 고장 난 배


090411ONE FATHOM BANK 018.jpg ONE FATHOM BANK 등대 부근의 Traffic Zone 을 통과하며.



그가 노련한 항해사이건 아니건 간에 어떠한 항해사라도 배 타면 원하는 일이 한 가지 있다.


-항해 운이 좋아서 바람과 파도를 만나지 않고 항해하는 것.- 아주 소박한 바람이기도 하다.


이번 항차는 그렇게 항해 운이 좋아 무던하게 여기까지 왔다. 사실 유별나게 까탈스러운 흠집이나 결함이 생기지 말아야 하는 화물의 입장도 가지고 있는 본선이다. 그렇게 화물을 겸한 본선으로 운항하여 마지막으로 가는 길인데 항해를 제대로 마무리 짓는다는 게 얼마나 바람직한 일인가.


마침 대낮이 한창인 오후 3시경으로 말락카 해협의 유명한 천소(淺所)인 ONE FATHOM BANK를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지난 세월의 평소 항해 당직자라면 최대의 조심성을 기울인 눈길로 주위를 살피며 지나치고 있어야 하는 항행 위험지역이지만, 마침 물때도 기상상태도 양호하고 시정 상태도 화창한 한낮이라 많은 여유로움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


거기에 지금이야 밤낮도 없이 수시로 선박의 현 위치를 정확하게 낼 수 있는 전자 항해 계기가 수두룩한 세월이니 당직에 열중하는 초조감이 줄어든 대신 적당히 관광객의 마음조차 가미된 눈길로 주위를 구경하듯 살펴보며 지나치고 있는 거다


어둠이 다가온다고 크게 신경 쓰일 일도 없긴 하지만 그래도 어둠은 긴장감을 가지게 하는 기제이므로 그런 편리한 장비가 없었던 시절에는 밤이란 어둠이 선박의 조종에 한 겹 더 어려움을 주는 사항이 되기도 했었다.


따라서 이 천소에 접근하는 항해를 할 때에는 얼마나 많은 정성을 기울이며 무사하게 이곳을 빠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 품으며 지나쳤고 낮에 통항하는 맞춤이 되면 또 얼마나 안도하며 좋아했었던가? 그렇게 아련한 추억을 머금은 곳 ONE FATHOM BANK 해역을 지나고 있는 거다.


090411ONE FATHOM BANK 023.jpg

ONE FATHOM BANK (한 길의 천소-라 번역하면 되겠지)에 설비되어 있는 등대의 모습

.

오늘은 그렇게 한낮의 시간에 이곳을 지나니 관광객이 된 듯한 마음으로 새삼 등대의 모습도 카메라에 담으며 여유 만만하게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편한 맘으로 안전하게 지나쳐 가는 등대의 모습이 저만치 뒤로 물러나 가물거리는 점으로 변해갈 무렵, 우리의 앞쪽 침로선 부근에 정선했음 직한 모습의 배가 한참 전부터 꾸물거리는 모습을 보이어 신경을 거둘 수 없게 만들어 주고 있다.


충분한 안전거리를 가지고 옆을 지나치며 살펴보니 내가 70년대에 탔었던 것 같은 원목선이다. 원목도 갑판에까지 가득 실려 있는데 두 개의 흑구를 올리고 있음을 보니 운전 부자유한 상태로 드리프팅을 하고 있는 중이다. 게다가 구명정도 우리 배와 마찬가지로 오픈 타입의 옛날 식 구명정이다.


운전부자유선을 표시하는 흑구 두 개를 올리고 닻은 내리지 않은 게 아마도 고장 난 엔진 수리를 하느라고 그럴 것이란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선미에 한 사람이 나와 인기척을 보이며 가까이 지나치고 있는 우리 배를 눈길을 올려서 쳐다보고 있다. 모르기는 하지만 지금 그 사람의 심정은 얼마나 우리 배의 사정이 부러울까?


예전 황천 속에서 배에 수침(水浸)이 되는 사고를 당해 펌프로 물을 퍼내는 비상상황으로 항해를 하고 있던 때, 우리 배 옆을 유유히 지나가든 커다란 배를 보며 부러워했던 시절이 겹쳐져 기억에 떠오르고 있다.


지금 경하 상태인 우리 배의 브리지 높이에서 한참이나 내려 다 보이는 그 원목선 후미는 어떤 산 정상에서 저 아래 한참 까맣게 멀리 떨어져 있는 산아래의 조그마한 오두막집 지붕이라도 보는 것 같은 기분을 만들어 준다.

목을 길게 뽑고 머리를 들어 우리를 쳐다보는 저 선원의 심정은 최소한 길 아래서 높다란 성벽의 베란다라도 올려다보는 것 같으리라.


햇빛이 눈부셔서 인가? 그 사람은 그냥 머리를 돌리어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때 그 배의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불쑥 솟아오른다. 고치고 있는 일이 제대로 돼가는 모양이다. 점점 멀어져 가는 그 배가 무사히 수리를 끝내고 어서 이곳을 떠나가 주기를 빌어준다.


이곳은 천소로도 악명이 높지만, 인간 말종의 악당들인 해적이 종종 출몰하는 별로 안전하지 않은 해역을 부근에 가지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090411CONSULAR배 005.jpg 운전부자유선을 표시해주는 흑구 두 개를 올리고 수리 중이던 원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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