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에 먼저 도착하여 승선할 배를 기다리다
승선할 배가 예정보다 늦게 도착하여 며칠 더 외항에 머물다가 부두에 접안할 예정이라서 좀 더 기다려야 한다는 전갈과 함께 그 기간 동안 묵게된 호텔로 지정받은 곳이었다.피곤했던 몸을 하룻밤 쉬고나서 주위를 살펴본다.
모텔 수준을 조금 벗어난 급수로 보이는 호텔이지만 그리 바쁘지 않아 보여 편안한 기분이 좋다. 아침 식사는 빵을 주로 한 뷔페식 식단이었고, 점심은 서빙하지 않고, 저녁 식사는 어느 정도 풀코스의 정식을 제공하는 식단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사실 엊저녁 이곳 호텔에 도착했을 때 내 형편은 상파오로 공항에 도착하기 전 이른 기내식으로 아침을 때운 후 계속 움직이다가 점심을 넘겼고, 저녁도 호텔에 늦게 도착하여 거르게 되어 화루 종일 굶은 셈이었다.
오늘 아침의 호텔 조식과 점심 식사는 호텔에서 알려준 역시 뷔페 식의 외부 그릴에서 때운 때문에 배가 많이 고픈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렇기에 저녁식사는 호텔에서 정식으로 하기로 마음먹고 시간에 맞추어 식당을 찾아 내려갔다.
조용하고 은은한 음악을 곁들여 준 식당에 들어서며 한껏 고조된 실내 분위기에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식탁을 찾아가 앉는다. 찾아온 테이블 급사는 공손한 자세로 일일이 옆에서 시중 들어가며 식사 주문을 받아주고 있다.
생선을 주로 한 메뉴의 정식을 청하였다. 그것으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그럼 마실 것은 어떤 거로 하시겠습니까? 물어 온다. 주스 류나 말하면 될 것을 순간적으로 와인을 청해 본다.
꼭이 술을 먹고 싶은 생각에서라기 보다는 그냥 해 본 소리같이 나온 말인데 이야기가 길어지기 시작한다.
거기에서 와인의 종류는 어떤 거로 하시겠습니까?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을 청하니 그럼 몇 년산 어떤 것을 하는 식으로 넘어간 와인 선택이 이젠 빼도 박도 못할 상황으로 번져나간 것이다.
은근히 가격을 걱정하게 되었지만 그래 기왕지사 이리된 것 즐기면서 먹기로 하자 마음을 다잡아 작은 병의 화이트 와인 한 병을 주문했다.
내가 평생 처음 보는 라벨의 와인이지만, 작은 병에 들어 있으니 아무래도 덜 비싸겠지 하는 심정으로 택한 것이지만, 제스처만큼은 그럴듯하니 알고 있는 듯이 써가며 주문을 끝내었다.
잠시 후 급사는 물 한 병과 내가 골랐던 와인 병을 잔과 같이 가져와 우선 잔에 반쯤 물을 채워주고 옆에 서있다.
우선 물 잔을 들어 한 모금 들여 마시어 입안을 곰곰이 헹구어 내는 기분으로 조용히 입가심을 하는 동안 그는 와인의 코르크 마개를 열더니 와인 잔에 조금 따라준 후 나의 다음 동작을 기다리며 내려다보고 있다.
천천히 와인 잔을 들어 우선 콧속으로 그 향기를 살며시 흡입하여 맡아본 후에 내 깐에는 최고로 우아한 포즈로 입안에 살짝 넣어 준 후 혀를 굴려가며 살며시 그 맛과 입안에 감도는 향기를 감상하는 포즈를 취하였다.
진짜로 입가에 감도는 약간의 신맛에 어울려 입안 혀 위에 머무는듯한 처음 느끼는 향기와 맛이 감칠맛으로 다가온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감각을 총동원하여 즐기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이윽고 살며시 삼켜 버리면서 와인의 개운한 뒷맛을 칭찬하는 말도 가만히 뱉어내 준다.
-델리시어스~ 그리고 그런 와인을 추천 해준 그의 안목에 감사하다는 눈인사를 보내니 그는 흡족한 웃음을 보내주며 내 곁을 떠나간다.
이제 내가 시킨 저녁 요리를 가지고 올 준비를 하러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틀림없이 비싸질 것 같은 저녁 식사의 가격을 생각해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론을 내었다. 내가 내 생전 언제 어느 곳에서 이런 호사(?)를 해가며 식사를 한단 말인가? 이미 시작된 오늘의 행사가 되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이런 정도의 평범한 호사도 못 누리고 살았다면 너무 내 인생이 삭막했던 건 아닌지 반성해보는 기분을 슬그머니 가져보기로 한다.
세상살이에 아등바등 거리며 살다 보니 너무 삶에 지쳐 있었던 건 아닌지 한번 반성해 보는 마음으로 오늘의 해프닝을 최대로 즐겨보자. 그래서 오늘이 내 인생에서 기억해주고 싶은 근사한 하루로 남겨두기로 하자.
생각을 그렇게 굳히기로 작정하고 분위기를 잡아갈 때 제일 먼저 떠 오른 아쉬운 사물이 있다. 엊그제 공항에서 헤어진 아내의 다시 보고 싶은 모습이다.
이렇게 기억해주고 싶은 장소나 때를 만나면 제일 먼저 같이 하고픈 사람으로 늘 떠 오르는 사람이 아내임을 기쁘게 생각하면서도 언제나 그렇게 늘 같이 못하는 현실이 서운할 뿐이다.
와인의 병 1/4 정도를 남겨두며 식사를 끝내었다. 후식으로 챙겨주는 파파야 한 조각을 더 먹어 입가심을 해 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대 앞에 서니 급사는 준비해두고 있던 계산서를 내밀어 내 서명을 구한다. 이 모든 경비는 후불로서 대리점이 정산해 줄 것이고, 출항 수속할 때 나한테 받아 갈 것이다.
마침 돋보기안경을 가지고 가질 않아, 서명하면서 계산서의 숫자를 자세히 읽어 볼 수는 없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크게 비싸지가 않다고 느껴졌다. 흡족한 맘으로 방으로 돌아왔다.
나 스스로를 그럴듯하게 존중해 주며 생을 즐기는 마음으로 보낸 하루가 그렇게 조용히 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