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소가 있는 불개항장 항구
해안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수심이 100미터는 그대로 넘어서는 필리핀의 지형적인 특성을 잘 알고 있기에 새벽 두세 시에 접근하게 된 PAGBILAO항의 묘박지로 다가서면서 최대로 조심하는 조선을 하다 보니 엔진 스탠바이를 하고 두 시간 반 만에 투묘를 하게 되었다.
그런 한밤중의 투묘였기에 조각 잠으로 보충하며 달려온 피곤을 덜기 위해서는 다시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거지만 도착 전보와 NR TENDER를 보내느라고 또 한 시간 남짓 쓰고 나니 동녘이 밝아오기 시작한다.
필리핀이라곤 이제 세 번째 찾아온 항구로 먼저 번에 찾았던 것은 모두 민다나오 섬의 다바오가 두 번 가가얀 디오로 항이 한 번이었다.
이제 이 항구 PAGBILAO가 세 번째 방문 항구가 된 것으로, 이곳은 일본의 투자로 루존 섬의 전력을 공급하는 발전소가 세워진 부두이므로 불개항장이지만 연료탄을 수입하기 위해 외항선이 드나들게 된 곳이다.
어제 낮부터 필리핀 내해를 달리면서도 제법 바람이 불어 백파를 일으켜 세우며 한 번씩 선수로 쳐올리는 파도로 날을 세워보던 날씨였지만 이곳에 도착하여 투묘를 하고 나니 바람도 파도도 별로 느껴지지 않는 조용한 상황으로 변해준다.
육지와 1.5마일 정도 덜어진 바짝 붙어선 투묘이니까 그 육지(섬)들이 바람을 막아주기에 그렇겠거니 생각하며 이제 제대로 눈 안에 들어오는 발전소의 굴뚝에서 빛나는 섬광 백등을 확인한다.
우리나라 발전소의 굴뚝에는 거의 홍등을 켜고 깜박이게 해 놨는데 여기는 홍등은 보이질 않고 백등만이 급하게 반짝이고 있다.
그 옆의 부두에는 배가 접안 해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작업은 하는 것 같지 않다. 항구를 관할하는 포트 컨트롤도 없고 해도도 지금 우리가 접근하며 사용한 해도가 마지막 해도로 사실상 항박도가 없는 게 좀 껄끄러운 상황이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이 항구의 특성임을…
아침 일찍 찾아올 것 같이 대리점이 알려주었던 수속 보트는 아침 아홉 시가 넘어서 나타나는데 배 모양이 쌍둥이 선체를 가진 선박이다.
본선은 우현 묘를 투묘하고 좌현 갱웨이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배의 모양상 뾰쪽한 한쪽 선수를 갱웨이 발판에 가까이 대고 우리 배로 올라오는 인원이 장난이 아닌 숫자이다.
여자들도 여럿이 섞인 십여 명의 승선 인원은 잠시 후 검역관과 대리 점원이 먼저 올라와서 수속을 하는데 신종플루를 점검하기 위한 체온 측정을 전 선원에게 실시한다.
내가 제일 먼저 이마를 닦아내고 그 위에 측정 테이프를 대고 검사하였다. 36.5도라고 이야기한다.
전 선원을 다 그렇게 재어서 기록한 용지를 챙기더니 떠나게 되었을 때 본드품에서 위스키 한 병과 담배 한 보루(열 갑)를 달라고 한다.
그 정도라면 아주 양호한 상황이라 여기고 가져다 주니 이제 검역은 끝났다며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는 세관과 출입국관리에게 알리라고 한다
드디어 배에 올라온 모든 인원이 수속 사무실에 들어오니 벅적거리는 시장 판 같이 되어 버린다.
이곳에서 하선 교대할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하니 지적해달라며 선원명부를 들어낸다. 다 찾아 준 그들의 이름을 확인하며 그들의 여권을 찾아내어 그곳에 하선한다는 도장을 찍고는 그 날짜는 나중에 나더러 정확한 날짜로 적어 넣어 달란다.
그동안 세관리-여자 공무원이었다.-는 자신이 챙길 서류를 다 챙기고는 옆에 있는 보조의 관리가 우리 배의 본드품 현황의 옆에다가 자신들이 필요한 수량을 적어놓고는 그대로 줄 수 있느냐고 물어 온다.
그 내용을 살피니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진빔 위스키 모두인 7병과 담배, 코카콜라, 맥주 등 그야말로 본선 본드 창고를 바닥내어 버린 상황이다.
어찌할거나 그들이 달라는 것을 무조건 거절하기에는 그 후에 닥칠 이런저런 비틀림의 해코지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우리들의 상황이니 울며 겨자 먹기로 응해주기로 한다.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대부분 받아 들은 후, 줄을 이어 조심스레 타랍을 내려가면서도 흐뭇한 마음으로 배를 떠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