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묘(走錨) -닻의 끌림

닻이 반란을 일으키다.

by 전희태
100121-D0_0051.jpg 얼음 바다 속에 내려진 닻줄(앵카체인)의 모습


배를 타는 항해 사관으로서 승선 중에 제일 만나기 싫은 일 중의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주묘(走錨, DRAGGING ANCHOR)라고 일컫는 상황이다


닻이 할 일을 못하고 바람이나 조류에 의해 끌리게 되어 선박의 안전한 위치가 위험 받게 변할 수 있는 사고를 뜻하는 말이 주묘이다.


따라서 모든 선박은 언제 어느 곳에 닻을 내려 주더라도 항상 위급 시 기관을 즉시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한 상태로 정박 당직에 임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주묘가 발생할 전조 상황으론 심상치 않은 바람소리를 제일 먼저 꼽을 수 있는데, 그래도 본선은 선체 구조상 바람소리가 타선들 보다는 크게 나지 않는 맘에 드는 상황을 가지고 있는 선박이다.


하나 오늘은 새벽잠에서 깨어날 무렵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바람소리가 들리는 듯싶어 얼른 커튼을 걷어 밖을 내다보니 제법 서슬 푸르게 일어난 파도가 흰 거품을 방금 갑판 위에다 뿌려주며 떠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심상치 않은 그 상황에 혹시 지금 배의 위치가 변해버린 일이 생기지나 않았을까? 걱정부터 들어선다.


그제부터 시작한 메인 엔진 피스톤 발출 작업을 위해 현재 주기 4번 기통을 분해하고 있는 중이다. 만약 닻이라도 끌려 바쁘게 기관사용이라도 필요하게 되면 여간 난감한 일이 된다는 점을 일깨우며 브리지로 올라간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듯이 온 브리지 내가 바람 소리로 씽씽 거리며 진동하는 가운데 풍향 풍속기는 선수 쪽에서 45~50노트의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다는 표시를 해주느라고 정신없이 바늘을 떨어대고 있다.


갑자기 불어대는 저 정도의 바람이라면 현재 7.5 샤클 만 내주고 있는 우리 배의 투묘 사정이 주묘로 이어질 것 같다는 걱정이 예감을 넘어서 들어선다.


마침 걱정이 된 듯 기관장도 브리지에 올라왔기에 현재 진행 중인 주기 보수작업을 중지하고 즉시 조립하여 언제라도 엔진을 쓸 수 있게 해달라고 주문한다.


아침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지내놓고 기관장은 기관실로 나는 브리지에서 각자의 일에 들어간다.


점점 더 세어지는 바람에 선수루가 허연 포말의 파도에 휩싸인다. 앞에 내보내어 닻을 감아들이는 일을 해야 하는 선원들의 사정이 은근히 걱정이 된다. 그래도 해야 할 일이니 선수루 부서 스탠바이를 걸어 즉시 닻을 감아 드릴 준비를 시킨다.


그동안 GPS를 통한 속력이 0.1노트에서 계속 늘어나서 어느새 1.0노트를 표시하는데 이렇게 되면 주묘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다.


바람과 파도 방향을 향해 가지고 있었던 선수가 어느새 바람 방향을 오른쪽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로 변하면서 거칠어진 파도가 우현 갑판 위를 휩쓸어 올라온다.


이렇듯 바람 부는 쪽에다 선체의 한 면을 계속 보이고 있다는 것은 닻이 끌리면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이다.


비록 끌리기 시작하긴 했지만 그래도 닻이 버티고 있는 힘에 의해 선수가 어느 정도 잡히면서 풍상 쪽 현이 바람과 파도에 직각으로 노출되어 들이쳐오는 바람이나 파도가 풍상 현에서 풍하 현으로 지나치며 갑판 위에 있는 구조물들을 휩쓸어 가는 일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뒤집힌 바다의 누런 황토 빛 파도가 우현에서 올라와 좌현 쪽으로 순식간에 휩쓸며 사라진다. 만약 저 파도 속에 앞으로 나가던 선원(사람)이 휩쓸리기라도 한다면 상상하기도 싫은 살 떨리는 일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다행히 좌현 쪽이 파도가 덜 올라온다는 사실을 알려준 후라 모두 좌현 갑판을 통해 선수에 나갔기에 그 무서운 파도는 인명 피해는 없이 그냥 지나갔다.


현재 기관사용을 할 수 없으니 배는 DEADSHIP 상태로 어서 빨리 주기 복구의 작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우선은 닻을 감아 들이기 시작하는 것은 끌린 닻을 빨리 감아들여 다시 안전하게 재 투묘하려는 것이다.


내어준 우현 묘를 감아 들이는 동안에도 비상시를 대비하여 좌현 묘는 언제라도 투묘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두고 있다.


한 번씩 찾아와서 파도를 덮어 씌우고 있는 날씨는 아직 몇 시간 넘어라도 계속할 태세라 닻이 끌리더라도 안전하게 끌려주기만을 기대하며 감아들였다.


1 샤클 온 덱이라는 보고를 받으며 아 이제 다시 투묘하여 제대로 선체를 같은 자리에 고정시켜주기를 바라는 중 어느새 닻을 내릴 때가 되었다.


원래는 좌현 묘로 바꾸어 내주려고 했던 것을 다시 우현 묘를 사용하기로 준비시켰다. 아무래도 우현 묘가 낫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다시 내어주는 닻을 이번에는 10 샤클까지 사용하기로 한다. 지금 우리 배에서 내줄 수 있는 최대의 샤클 양이다.


그동안 지나치던 타선들과는 안전하게 다 지났건만 이제 우리 배의 뒤에 한 척 있는 것은 불안할 정도로 가까워질 수 있는 상황인데 그 배가 우리를 불러 본선의 닻이 끌리고 있으니 확인하라는 전달을 준다.


우리 배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경계한 이야기이다. 알겠다고 하고 이미 내어주기 시작한 닻줄을 계속 신출해준다.


10 샤클-275미터 길이의 닻줄-이 다 나가고 이제 홀딩한 상태가 되니 배의 선수가 풍향 쪽을 향해 서려고 슬슬 돌아가기 시작한다.


 이윽고 선수로 바람과 파도를 맞으며 서는 배의 자세로 인해 선내에 들어가 있으면 바람이 불거나 파도가 있단 사실을 모를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은 지켜보며 기상상황이 나아지기를 기다리기 시작한다. 새벽에 50노트까지 오르락거리던 풍속기의 바늘이 그나마 40노트 정도까지 갔다가 금세 30노트대로 떨어지는 변덕 부리는 모습에 기대를 걸고 더욱 잦아들기를 고대하며 기다리기 시작한다.


<재 투묘해 준 후 만난 태양과 바다는 언제 심술부렸냐 싶게 어느새 조용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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