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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희태 Jan 20. 2019

급유 후 홍콩 출항

 광조우 출항 홍콩 도착의 바쁜 일과로 인해 새벽 두 시가 넘어 잠자리에 들었었지만 잠에서 깨어난 것은 평소 습관대로 어김없이 새벽 다섯 시 부근이다. 그냥 일어나기로 하며 습관대로 커튼을 들쳐서 창 밖부터 내다본다. 


 우현에 접안하고 있는 유조 바지선의 모습이 보이고 있음은 아직까지 급유작업이 끝나지 않았다는 의미임을 알아채며 세면과 매무새 정리를 한 후 브리지에 올라 주위를 살펴본다.


 어느새 어둠이 가셔진 주위에는 LAMMA섬의 해안가 바위들이 아주 가까이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게 보인다. 

홍콩에서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다

.

급유를 끝내고 출항 후 주위의 모습.



 섬 주위의 바위 모습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엊저녁 한밤중에 이곳까지 찾아들어 닻을 내린 내 행동이 용감하였던 것일까? 아니면 무모했던 것일까? 잠깐 생각에 잠기게 만들어 준다. 


 그러나 현대의 항해장비는 그만큼 발달하여 좁은 구역이라도 정확하게 움직이면 얼마든지 안전하게 움직일 수 있게끔 도와줄 수 있는 것이니 그런 점들을 잘 이해하면서 제대로 투묘한 것이다. 


 투묘지 선위의 이상 여부를 잘 살펴보고 대리점이 요청해 온 서류들이 제대로 준비되어 있는지 점검해본다.


 최근에 이곳에 찾아와 투묘해 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이다. 지난번에도 벙커링을 하려고 찾아와 닻을 내렸었지만 본선에 접안하려던 벙커 바지가 나쁜 날씨로 인해 자신들의 윈치가 부서지는 일을 당한 후 본선에게 그 책임의 일부를 물을 수 있게 서류를 작성해서 서명을 요구하는 것을 딱 잘라 거절하였더니 급유를 포기하고 떠났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더 이전에 이뤄진 홍콩과의 인연은 40년이 넘어 저편, 나의 초년 선장 시절과 배를 처음 타던 초급 항해사 시절로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외항선 3 항사로 해운공사의 제주호를 타고 처음으로 이곳 홍콩을 들렸을 때인 1967년대에 받았던 첫인상으로는 사치와 화려함이 곁들인 밝은 면을 보며 부러움과 동경도 많았던 곳이지만, 한편으론 어두운 뒷골목의 다가구 주택들의 창 밖으로 삐죽이 내걸린 장대에 꿰뚫려 걸려있던, 바람조차 외면하여 풀 죽어버린 빨랫감으로 대표되던, 도시 빈민의 가난하고 찌든 애잔한 모습도 뇌리에 새겨져 있다.


 당시 우리나라도 잘 사는 나라에는 들지 못했기에, 홍콩에서 만나 볼 수 있는 외형적인 사물은 모두가 부러운 것 투성이로 막말로 무슨 물건이라도 사 가지고 우리나라에 들어가면 그게 자랑거리가 되고 남들의 부러움을 갖게 만드는 일이 되곤 했었다.


 세월은 우리와 같이 흐르며 이제는 외국항에서 그들의 물건을 무조건적으로 탐하거나 아쉽게 여기는 일도 없어지고, 배를 타며 느꼈던 관해 관청의 관리들과의 껄끄러움도 잊힌 옛날이야기가 되어있다. 오히려 외국 선원들이 우리나라 기항 시 하는 행동을 옆에서 지켜보며 옛날 우리들의 철없이 굴었던 외국항에서의 모습을 떠 올리면 절로  머쓱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변화는 이미 선진국에 들어서 있는 조건의 하나로 여겨지기에 아직도 선원들에 대해 까다로운 입항수속을 하며 손을 벌리고 있는 몇몇 후진국의 행태에 절로 고소를 짓기도 한다.


 그런 외적인 일을 떠난 내 개인적인 사안으로도 홍콩이라고 하면 무시할 수 없는 일이 한 가지 더 있으니, 그곳에 내 가까운 피붙이가 살고 있다는 또 다른 반가움이다.


 이번 같이 급유만을 위해 방문했을 경우 찾아왔어도 서로 만날 수가 없는 상황이 되다 보니 오히려 안 온 것보다 못한 것 같다는 찜찜한 기분마저 가져 보지만 그래도 반가운  사람이 사는 고장이 주는 친근함이 있는 거다. 


 그런 내 개인적인 생각들은 뒷전으로 밀어 놓으며 투묘 작업까지 끝낸 후, 이번에는 밤새워 가며 기관부가 기름을 수급받는 동안 최소한 두세 시간 정도는 마음 놓고 새우잠이라도 자서 피곤을 풀기로 했던 것이다. 



 열한 시에 오겠다고 연락을 해주었던 대리 점원이었지만 빨리 끝난 급유 작업으로 9시쯤이면 도착할 거라고 예정을 당겨서 통보해 왔다.


 멀리 우리 배를 향해 오는 것으로 짐작되는 통선이 보일 때부터 준비하고 기다리는데 풍하현(風下舷) 쪽의 배 옆으로 가까이 오려고, 선미 쪽으로 접근하여 우현 쪽으로 오던 통선이 마침 그물질을 하고 있던 두 어선 사이의 그물에 걸려들어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마침 같이 항구를 빠져 나와 다른 선박으로 수속을 나가던 동료 통선으로 우선 사람들만 옮겨 타고는 우리 배로 접근해 온다. 


 그러나 약한 파도의 출렁임이 있어 배에 올라올 형편이 못되어 그냥 줄을 내려주어 서류를 주고받은 후 출항하기로 한 후 MARDEP에 보고를 하니 출항 면장의 번호를 확인한 후 출항하도록 허가해 준다.


 슬슬 뒤로 물러나는 홍콩을 바라보며 만나지 못하고 떠나는 동생에게 언제나 건강하라고 마음의 인사를 보낸 후 조선에 임한다.  

여기는 많은 배가 모이고 헤어지는 HONG KONG의 TRAFFIC ZONE 안이다. 

우리 배와 나란히 출항을 하다가 우리에게 침로를 비껴주어 뒤로 빠진 MOL의 컨테이너선


 용선주는 떠나는 순간까지도 어디로 가야 할지를 결정해 주지 않고 있었다. 막연히 호주로 향하면 되겠거니 하고 떠났는데 그들(용선주)은 한낮이 되어서야 남아공의 리처드 베이로 향하라는 연락을 해온다. 


 우선은 호주를 간다고 생각해서 필리핀 쪽을 향하고 있던 침로선을, 얼른 남아공을 가기 위한 장거리 코스의 시작점을 향하도록 바꾸어 주면서 전체적인 항정선을 찾기 위한 작업에 들어간다.


 여기서 리처드 베이까지 가는 방법은 두 가지이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마락카 해협을 통해 가는 방법과 두 번째는 순다 해협을 통과하여 인도양으로 빠져서 가는 두 가지 길이 있는 것인데 나는 후자인 순다해협을 통항하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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